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크롬은 자신의 집에 와있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가슴에 난 총상으로 뚫어진 옷과, 그 안에 아무런 상처도 없이 아물어있는 자신의 가슴을 거울에 비춰보고는 그제서야 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크롬은 모든 것을 바로 잡기로 결심했다. 아니 비록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다.
크롬은 이나스 제국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그는 변장을 한 상태로 자신을 흠모했던 여러 군대의 지휘관과 만났다. 지휘관은 크롬이 살아있다는 것에 크게 놀랐고, 크롬은 자신의 목적을 굳이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는 아수라와 교감을 나눈 이야기를 하면서 엘로이족 지휘관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번번히 퇴각 명령이 떨어졌는가?’
‘왜 아수라를 통솔하는 여제는 황가의 제후들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된 것일까?’
‘도대체 여제의 아이들의 아버지는 누구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엘로이족 전사라면 누구나 품었던 의문들이었다. 그들은 전사이자 군인들이었다. 크롬은 사이오닉 기어의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신뢰를 얻어냈다. 게다가 크롬 특유의 카리스마가 작용해 그에게 동조하는 엘로이족은 급속도로 늘어갔다. 이나스 황가의 압제정치를 목격해온 전사들에게 크롬은 희망의 상징이 되어갔다.
크롬을 제거했다고 생각한 제후들은 정비를 위해 레인 여제의 1주년 즉위를 기념하여 전선에서 군대를 불러들여 사열시키고 군단장을 교체하기로 했다. 크롬은 과감하게 열병식에 나서는 전사들 속에 숨었다. 그와 같이 열병식에 나선 전사들조차 자신의 옆에 서있는 자가 전설로만 들리던 ‘철혈의 크롬’이라고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크롬을 대신해 새로 임명할 군단장의 이름이 불리고, 단상으로 새 군단장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나오던 그가 갑자기 칼을 뽑아 제후들을 호위하던 근위무사들을 베기 시작했다. 근위무사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하며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제후들 역시 놀라 뒤로 물러났다. 새 군단장이 투구를 벗고 얼굴을 내놓았다. 제후를 호위하고 있던 주닌이 그를 보고 소리쳤다.
“으아악! 크.. 크.. 크롬이다!”
제후들도 뒷걸음질을 치며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반역! 반역이다! 크롬이 반역을 일으켰다!”
사열대의 앞에 서있던 장군들도 크롬과 함께 칼을 뽑고 제후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제와 제후들을 호위하던 근위무사들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장군들 속에서 크롬이 소리쳤다.
“무기를 버린 자들은 죽이지 마라! 우리는 제후들로부터 전사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크롬은 전장에서처럼 일사불란하게 반란군을 지휘했다.
“여제를 보호하라! 우리의 적은 제후들이다!”
크롬은 사이오닉 기어를 통해 레인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라고 아수라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레인은 몸에 전류가 흐르는듯 움찔거리더니 잠시후 크롬에게 놀란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이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터져나온 것은 해방의 눈물이었다. 여제를 안심시킨 크롬은 장군들과 함께 제후들에게 다가갔다. 이제 저들을 발밑에 둘 차례였다. 아수라가 알려준 것 말고도 어떤 진실을 숨겨왔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파헤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근위무사들은 크롬이 다가오자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뭣들하느냐! 어서 크롬을 죽여라!”
주닌이 근위무사들을 칼로 위협하며 악을 쓰고 있었다. 크롬이 주닌을 발견하고 들고 있던 칼을 세차게 던졌다. 칼은 정확하게 주닌의 이마에 깊숙히 꽂혀버렸다. 주닌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나는 크롬이다! 나를 막을 자는 누구냐!”
크롬이 주닌의 이마에 박힌 칼을 뽑아들며 외쳤다. 전의를 상실한 근위무사들은 파도가 갈라지듯 크롬의 앞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이제 제후들과 크롬은 불과 몇 발자국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되었다. 크롬의 친위대인 루이가 제후들을 보며 말했다.
“새로운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라!”
그 말 한마디에 제후들은 앞다투어 무릎을 꿇었다. 700여년을 지탱하던 이나스 황가는 그렇게 무너졌다. 제후들은 크롬에게 굴복했고 그날부터 크롬은 아수라를 비롯한 제국의 전권을 차지했다.
크롬은 제후들이 금역으로 지정해온 아수라의 중심부에서 한동안 황가의 치부를 파악하고 이를 응징하는데 몰두했다. 크롬은 황위 계승 체제가 유지되었던 모습을 직접 보았고, 큰 분노에 빠졌다. 몇몇 제후들은 직접 죽여 본보기로 삼고 그들이 공포속에서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황위 계승청은 폐쇄되었으며, 계승청의 굴레에 있던 어린 계승자 후보들은 크롬의 보호하에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제후들을 모두 참살하고 싶었으나, 크롬은 그들이 가진 아수라에 대한 지식과 경험들을 모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부 제후들은 계약자들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을 보게 하였다. 대신에 그들은 모두 거세되었다. 그동안 계약자들을 잔인하게 유린한 댓가로 받은 형벌이었다. 제후들은 이제 그들만이 누리던 영원한 젊음과 불사의 열매를 빼앗기고 황실의 내시가 되어 초라하게 늙어가는 자신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크롬이 선택한 사형보다 더 잔인한 처벌이었다.
크롬은 레인 여제의 간청에 따라 그녀를 폐위 시키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계약자는 여성만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존의 계약자 후보들 사이에서 계약자가 될 새로운 황후를 맞이하는 수 밖에 없었다. 크롬은 레인를 끝으로, 기존의 황위 계승 체제는 막을 내릴 것이며 앞으로 그의 자손들 중 황후나 공주가 계약자의 자리를 이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또한, 자신의 뒤를 이을 황위의 후보자는 크롬의 아들이 아닌 엘로이 전사들 중에서 뽑겠다고 밝혔다. 모든 엘로이족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이기도 했지만, 황제 자리로 대표되는 권력의 세습을 크롬은 바라지 않았다. 이미 제후들의 추악함을 목격한 그로서는 자신 또한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황제 자리에 어울리는 가장 강안한 전사에게 그에 맞는 자리를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대관식을 끝낸 크롬은 레인과 함께 아수라를 만나러 기둥으로 갔다. 기둥에 적혀있던 카일러미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제국을 세우느라 바빴지만 크롬은 결코 잊지 않았다.
“좋습니다. 크롬, 당신이라면 ‘위대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군요.”
크롬은 이제 그 목적이란 것이 무언인지 알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는 아수라의 대답을 기다렸고, 아수라가 형상화된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수라가 기둥에 빛을 띄우고 있었다. 기둥에 쓰여진 글씨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기 쓰인 그대로 입니다. 당신들은 애당초 그곳으로 가기위해 계약했습니다.
카일러미아로 가서 당신들에게 능력을 부여한 이 유전자의 원래 주인인 루흐다인들과 영광스러운 유산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크롬은 무언가 새로운 목적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가 물었다.
“카일러미아는 어떤 곳이지?”
“낙원이자 당신들의 최후의 안식처입니다. 그곳에서는 어떠한 생명유지장치 없이도 정착해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과거 당신들의 조상들이 떠났던 지구와 똑닮은 모습입니다.”
아수라가 행성의 풍경들을 허공에 띄웠다. 크롬과 레인 주변에 행성의 자연 풍경들이 펼쳐졌다.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이 크롬은 크게 매뇨되어 주먹을 불끈 쥐고 서있었다. 저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더이상 싸울 이유가 없어질 것이라는 것에 그는 매우 만족했다.
“저기는 어떻게 가면 되지?” 크롬이 물었다.
“이 기둥에 적혀 있는 룰을 지키면 됩니다. 당신에게 대적하는 다른 야만인들을 모두 제거하는 겁니다. 그것이 카일러미아로 가는 좌표를 획득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참 간단한 방법이군.”
크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쟁은 그가 가장 자신있는 분야였다. 황제 크롬은 즉각 야만인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대규모의 군사 작전을 몸소 지휘했다. 레인은 크롬에게 남매로서 마지막 전쟁을 직접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크롬은 기뻐하며, 레인을 통해 아수라를 전략적인 거점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새로운 전술이었다. 그동안 아수라를 철저히 방어에만 사용해왔던 기존의 방식을 뒤엎은 것이었다. 이 전술을 본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크롬의 힘이 아닌 지혜에 감탄하며 그를 더욱 더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다.
‘최후의 전투’라 불리는 순간이 임박했다. 결과적으로 최후의 전투는 아니였지만, 전설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이 전투에서 크롬은 친히 황제를 상징하는 새로운 전신 갑주를 입고 나타나 선봉에 섰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 앞에서 작전을 설명했다. 자신을 미끼로 야만인들의 주력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린 후, 적의 모함을 포획하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그 작전의 대담함에 모든 전사들은 전율을 느꼈다. 크롬은 그들 앞에서 카일러미아로 가는 계획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했다.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 때문에 아무도 그런 꿈은 꿔보지도 못하고 살아왔었다. 크롬은 아수라가 보여준 카일러미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공개했다. 전사들은 그제서야 크롬의 뜻을 알았다. 그들의 황제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는 계속된 전쟁이 아니라, 그것을 끝내길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곳이 이름은 카일러미아라고 한다. 우리의 일부분인 이들이 우리에게 약속한 세상이다.
나는 그래서 우리의 새 제국의 이름을 ‘카일럼’으로 짓고자 한다.
우리는 카일럼인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조상인 루흐다를 계승하여 예정된 낙원에 반드시 도착할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좌표를 얻기 위해서는 저들을 이곳에 잠재워야한다.”
크롬은 칼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다. 낙원은 바로 우리들의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곧 카일러미아의 운명이 될 것이다.
모두들 행운을 빈다. 살아서 만나기를 바란다. 죽은 이들은 바하문에서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주길 바란다.”
전쟁은 카일럼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야만인들의 플래닛을 탈취하였고 카일럼의 아수라가 아레나를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레인은 자신은 카일러미아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롬이 황제가 된 이후로 더이상은 엘릭서를 제후들에게 빼앗기는 일은 없었지만,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이제는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카일러미아로 가는 좌표를 제 손으로 열게 해주세요.” 레인이 힘겹게 말했다.
“그곳에 도착한다면 네 손을 잡고 처음으로 발을 내딛고 싶었다.” 크롬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영원히 함께 할꺼에요. 먼저간 사람들과 함께 바하문에서 지켜보고 있을께요.” 레인이 말했다.
“고마웠어. 내 하나뿐인 동생. 이제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곳에서 편히 쉬어.”
크롬은 레인이 좌표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대한 빛과 함께 카일러미아로 가는 항로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크롬과 레인, 두 남매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레인은 친오빠의 품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카일러미아로 떠날 일만 남았다. 황제 크롬은 엘로이족과 기어스족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가져다 줄 안식을 이야기했다. 일부는 계속 반신반의했지만, 대다수의 백성들은 크롬의 말을 완전히 신뢰했다. 그러나, 다음 계약자를 정하지 못하면 카일러미아로 출발할 수 없었다.
이제는 황궁의 내시 역할을 하게 된 제후들은 이번 계약자의 선정이 그들의 목숨을 담보할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크롬과 사이가 나빠질 수 있는 후보를 제시해야했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고른 후보는 바로 그레이스였다. 그녀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명랑하고 활발했다. 여자임에도 격투를 좋아했고, 번번히 황궁을 탈출하여 엘로이족 청년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녀는 발군의 신체조건과 미모를 갖추어 엘로이족의 젊은 전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젊은 엘로이족 전사 중 하나인 클라우스와 사랑에 빠져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내시들은 그녀를 계약자로 삼아야한다고 크롬에게 주장했다. 다른 계약자 후보들은 너무 신체가 허약하여 장기간의 성간 여행에서 아수라를 맡기에 힘들다는것이 그들의 주장이였다.
내시들은 그레이스가 계약자가 되면 그녀가 사랑하는 클라우스가 차기 황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클라우스의 가문은 이나스 시절부터 제후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오래된 명문가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들이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되는 셈이었다. 크롬도 그레이스를 처음 보고는 다른 계약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스의 넘치는 생동감은 새롭게 출발하는 카일럼의 황후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레이스를 황후로 선택하겠소.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길 바라오.”
크롬이 말했다. 황제가 원한다면 계약자 신분으로서는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운명에 괴로워하며 연일 혼인의 승락을 미루고 있었다. 내시들은 그레이스의 마음을 돌리려, 클라우스를 사소한 죄로 엮어 투옥시키고 말았다. 그 사실은 안 그레이스는 클라우스의 석방을 요구했다.
“계약자로서 황후가 되는 것이 클라우스를 돕는 유일한 길입니다.”
량진바오가 말했다. 황위 계승 체제를 제안하고 만들었던 그는 용케도 살아남아 내시가 된 채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왜 자꾸 클라우스와 저를 엮으시려고 하는거죠? 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레이스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더 잘된 일이지요.” 량진바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황후가 되겠어요. 그럼 된거죠?” 그레이스가 체념한 듯 말했다.
“카일럼의 모든 백성의 명운이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그게 당신의 운명이지요.”
량진바오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 개인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한 일이기에 자신을 희생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클라우스는 내일 풀려날 겁니다.” 량진바오는 방을 나서며 슬쩍 말했다.
마침내 이주준비가 완료되었다. 카일럼 제국은 주저없이 아수라와 마지막 전투에서 야만인들로부터 포획한 플래닛에 모든 백성들을 태우고 카일러미아로 떠났다. 카일러미아로 항해하는 그 십여 년 간의 여정 동안 크롬 황제는 운명이 정해진 곳으로 도착한다는 꿈에 기대어 도착할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황후 그레이스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는 카일럼의 첫번째 공주인 레나 크롬이 태어났다.
카일러미아 도착 한 후, 내시들은 꿈꿔왔던 반역을 획책하다 크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간악한 내시들은 황후를 짝사랑한 클라우스가 벌인 일이라며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크롬은 뭔가 석연치는 않았지만, 반역의 씨앗을 그냥 남겨둘 수는 없었다. 내시들의 적극적인 간언에 클라우스는 변명도 해보지도 못하고 처형당했다. 내시들이 살아남기 위해 그의 입을 영원히 다물게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클라우스를 결국 죽이고 말았군요.”
그레이스가 크롬에게 말했다. 마음속에는 커다란 분노가 일렁대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쩔 수 없었소. 반역의 증거가 너무나 명백했기에 그는 죽어야 마땅했소.”
“황제를 거스르는 자마다 모조리 죽여버린다면 이나스와 카일럼이 다를게 뭐가 있나요?”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돋혀있었다.
“그게 아니라는걸 잘 알지 않소? 카일럼은 전사들의 손으로 만든 나라란 말이오.”
“전 모르겠군요. 그냥 아수라를 차지 하기 위한 권력다툼으로 밖엔 보이지 않네요.”
“황후, 말이 너무 심하시오.” 크롬이 조용히 타일렀다.
“당신은 전쟁을 그만 끝내고 싶다고 항상 말했어요. 하지만 말 뿐이에요. 당신은 손에 항상 피를 묻혀야만 살아갈 수 있는 전쟁광이자 살인자에요! 모두가 당신에게 굴복하고, 그 누구도 당신에게 거역하지 않을 때까지는 절대 살육을 멈추지 않을 거에요.”
크롬은 그레이스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분노에 가득찬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이 사실이오?” 크롬이 조용히 물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래도 당신을 청혼을 받아 들인 것은 백성들을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저주받은 운명은 앞으로도 저를 더 많은 살육으로 끌어들이겠죠. 당신이 원하고 있으니까.”
크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보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에도 그녀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슬프고 애석할 뿐이였다.
“그런 운명이라면 이제는 따르지 않겠어요. 저는 계약자로서 애초부터 실격이었어요. 하지만 어쩌다보니 간택이 됐고 여기까지 왔죠. 잘못된 선택이였어요. 저는 그때 운명과 싸워야했어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요?” 크롬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난 당신과 운명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거에요.”
“그런 생각은 하지말길 바라오. 황후답게 행동하시오.” 크롬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더 이상 당신의 황후이고 싶지 않아요.” 그레이스가 똑똑히 말했다.
“황제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말이오?”
“네. 저는 거부합니다.” 그레이스는 크롬을 똑바로 보고 답했다.
“우리 딸, 레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런 말을 하시오?” 크롬이 어이없어 물었다.
“레나에게 꼭 전해주세요. 운명은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싸워서 만드는 것이라고….”
“그레이스!” 크롬이 소리쳤다.
“아페리오!”
그레이스가 자신의 발아래를 둥글게 가리키며 아수라에게 명령하여 바닥을 열게하고 스스로의 몸을 던졌다.
“안돼!”
크롬이 손을 뻗어보았지만, 이미 그레이스는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꽃잎처럼 흩날리며 추락했다. 공교롭게도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어느 봄날의 일이였다. 황후 그레이스를 잃은 크롬은 그 이후 한 가지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일러미아에 먼저 도착해 있었던 가이아와 에르시온에게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했다. 그는 전쟁을 정말 그만두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전쟁의 불씨를 처음부터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일이 필요했다. 가이아와 에르시온이 불복하자 크롬은 단박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하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전쟁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런 심정이였을 것이다. 아레나를 제패한 무패의 카일럼, 철혈의 크롬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