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럼 제국의 황궁안, 집정전의 가장 높은 곳인 용상에 앉아 있는 크롬은 몹시 화가 나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군의 지휘관들과 신하들을 내려다보았다. 틸리아페테 전투에서의 뼈아픈 패배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아레나 행성에서 수많은 외계 종족을 당당히 물리치고 카일러미아로 온 그들이 아니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시온-가이아 연합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크롬은 탁자를 내려치며 큰 소리로 질책하고 있었다.
“아수라가 진군하기 위해서는 양국의 군대를 반드시 분리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것이… 적군이 공세에 나서지 않고 철저하게 방어에만 치중하는 지라….”
카단 장군이 엎드려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크롬은 탁자에 놓인 지도를 집어 카단에게 던지며 말했다.
“이 버러지 같은 놈! 수 개월 동안 축적한 아수라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도 단 일보도 전진하지 못하다니!”
“죽여주십시오. 폐하!” 카단은 엎드린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용서만을 빌 뿐이었다.
이때, 크롬의 안색을 살피던 승상 버간이 슬며서 나서기 시작했다.
“에르시온의 로이 태자와, 가이아와의 듀발 장군은 역시 범상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마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것처럼 전투를 했다 합니다. 특히, 로이 태자는 아수라와 바둑을 두듯 치열한 수싸움을 한 지라, 아수라의 에너지가 매우 많이 사용되었다 합니다.”
그러자 크롬의 화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크롬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아레나행성에서 밥먹듯이 전투만 하며 자란 그에게는 새로운 맞수의 등장은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흠…. 그래? 역시 에르시온의 젊은 수호자다 이거군…. 게다가 화룡을 마음대로 다룬다는 듀발까지….”
“폐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후방의 미스트롬리움 산지의 반란이 진압되었으니, 아수라는 더욱 강해질 것이옵니다.”
버간은 크롬을 달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전투에서 진 것은 이미 되돌 수 없는 사실이였고,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존심에 금이 가 분노에 차있는 황제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폐하,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죽음으로 틸리아테페를 점령하겠나이다.”
카단 장군이 소리를 높여 외쳤다. 카단 역시 크롬은 자비심이 없는 지도자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다. 에르시온의 젊은 수호자가 등장했다면, 이 카일럼의 패왕 크롬이 직접 상대를 해줘야겠지.”
크롬이 말했다.
“다음 원정의 승리는 틀림없이 폐하의 것이옵니다.”
일동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흥! 그새 모두 피냄새가 그리워진 모양이군요.”
어디선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뜻밖의 발언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공주 레나가 서있었다.
“공주마마! 국사를 논하는 중신들을 어찌 그리 매도하십니까?”
승상 버간이 놀라 레나에게 말했다.
“공주마마, 병사들이 듣는다면 사기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카단 장군도 한마디 거들었다.
“병사들의 사기를 그렇게 잘 살피셔서 퇴각에 앞장서신 건가요?”
레나가 쏘아붙이자 카단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다 발끈하여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황후마마께서 살아 계셨다면 결과는 달랐을 겁니다.”
카단의 말이 끝나자 마자. 다른 대신들은 아연실색이 되었다. 절대 해서는 안될 말이었기 때문이였다.
“그럼, 모두들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지 마셨어야죠?”
크롬도 당황한 안색이었다. 크롬은 공주의 호위무사 하일을 바라보았다. 하일은 크롬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공주마마,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버간이 공주를 진정시키려 들었다.
“제가 어리다고 기억을 못할 줄 아셨나요?” 레나가 소리를 높였다.
“황후마마의 불행한 사건은 순전히 사고로…” 카단이 말했다.
“장군!” 버간이 놀라 장군의 말을 막았다.
카단의 말을 흥분한 채로 듣고 있던 레나가 갑자기 표정이 싸늘하게 굳더니, 눈동자가 없어지고 양 미간 사이로 붉은 광채가 나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무중력 상태로 들어간듯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몇몇 신하들이 놀라 외쳤다.
“결계의 혈성이다! 피해야돼!”
“으아악!”
“어서 도망을!”
극도의 공포에 질린 신하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호위무사인 하일이 빠르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떠오르던 레나의 다리를 잡았다.
“공주마마, 제발….”
하일의 말에 레나는 정신을 약간 차린듯 느껴졌고, 그녀의 이마에 있던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레나는 이내 정신을 잃고 푹 아래로 꺼지듯이 쓰러지고 말았다. 하일은 쓰러지기전 레나를 얼른 안아 올리고는 크롬을 보았다. 크롬은 아무런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일이 크롬에게 목례를 하고 집정전을 나섰다. 신하들은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저게 그 말로만 듣던 결계의 혈성입니까?”
“으.. 묻지말게. 너무 끔찍했어. 그 때처럼 모두 다 죽는 줄 알았다니까….”
레나의 이마에 결계의 혈성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였다. 레나의 어머니인 그레이스 황후가 죽음을 맞이한 그 날, 문무대신들은 황궁에 정원에 모여 황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황후님이 죽음이 자결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소이다.” 대신 중 누군가가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이….” 어디선가 혀를 차며 한숨을 쉬는 소리도 들렸다.
“그렇다면 이제 레나 공주님이 뒤를 잇게 되는 것이오?”
“그렇지 않겠소?”
“나이가 너무 어린데, 다른 후보자를 황후로 삼아야하지 않을까요?”
“그건 황제께서 결정하실 일이오.”
“그나저나 황후는 왜 자결하신 게요? 어디 들은바나, 짚이는 것이 없소?”
모인 대신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엄마가 죽었다구요?”
레나가 어느새 대신들의 틈에 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신들은 자기들끼리 쑥덕대느라 어린 공주가 와 있는 것도 미처 몰랐다.
“레나 공주님… 그것이….”
한 대신이 공주를 달래보려고 허겁지겁 말을 붙여보았다. 레나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시작했다. 그리고는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눈동자가 사라지고 있었다.
“공주의 이마에!”
누군가 소리쳤다. 레나의 몸이 약간 떠오르더니 이마에서 선명하게 붉은 광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머리 위로 아수라의 섬광이 번쩍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참을 지난 후에 황궁의 시녀가 발견한 것은 사람들의 형체는 사라지고 검게 탄 흔적과 핏자국만 난무한 정원에 혼자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레나뿐이였다. 그 사건이 생긴 이후로 카일럼 황궁에서는 레나 공주의 심기를 건드리면 아수라로부터 잔인한 천벌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날 죽은 대신들은 황후를 따라 자살한 것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어두운 밤이지만, 빛나는 광채가 보이는 아수라의 아래, 황궁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첨탑의 최상층부에는 신비로운 외계문양으로 장식된 아치형의 다리가 있었다. 레나는 그 다리를 따라 아수라가 떠있는 바로 아래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호위무사인 하일이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오래 걸릴지도 몰라.”
다리 끝에 다다른 레나가 하일을 돌아보며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하일이 무릎은 꿇은 채 말했다.
“매번 미안하잖아.”
“아닙니다. 제 일인걸요.”
“고집쟁이.”
레나는 무표정한 하일을 뒤로 한 채, 아치형 다리의 끝에서 벽을 통과하듯이 아수라로 들어가버렸다.
아수라의 조종실 중앙으로 떠오른 채 도착한 레나는 아래쪽으로 바닥이 생기자 다시 가볍게 내려섰다. 레나의 눈 앞에는 흐릿하게 비치는 황후의 입체 영상이 보여지고 있었다. 레나는 슬픈 눈으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황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수라의 힘을 가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야. 너만은 그 운명을 피할 수 있길 바랬는데….”
“아니에요. 이제 아수라는 이 궁궐 안에서 제 유일한 친구인 걸요.”
레나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겨우 말했다. 사실 이 영상은 황후가 죽기 직전에 레나를 위해 만들어둔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아수라에게 레나가 15살이 되면 영상을 보여주라고 부탁을 해두었다. 그녀가 죽기로 결심했을 때는 레나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5살 생일이 되던 날 밤, 레나는 아수라로부터 이 영상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로 레나는 몇 번이나 이 영상을 보러 아수라를 찾았다. 너무나 많이 보아서 내용을 다 외우고 남았지만 그래도 레나는 매번 어머니를 보러 아수라를 찾았다. 오늘도 레나는 영상으로나마 만날 수 있는 어머니와 매번 똑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걸 받으렴.”
황후가 반지 두 개를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레나는 처음 보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반지를 받는 시늉을 했다.
“해와 달의 반지… 일월쌍환이라 불리는 것이란다. 사모하는 사람과 나눠끼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단다.”
“이걸 왜 저에게?”
“내겐 따로 사모하는 사람이 있었단다. 하지만 내가 망설이는 사이에 그는 목숨을 잃고 말았지. 그때, 이 반지를 나누어 꼈었더라면….”
“엄마….”
“너만은 꼭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엄마, 흑흑”
레나는 엄마의 영상이 있는 자리의 크리스탈을 껴안고 울고 있었다. 매번 똑같은 영상이었지만, 레나는 한결같은 그리움으로 서럽게 울었다.
“불쌍한 내딸….”
황후의 말이 끊어지며 입체영상이 부서지듯 사라졌다.
“여기까지입니다.” 아수라가 말했다.
“알아…. 고마워.”
레나가 울음을 그치고 말했다.
“황후님은 기원의 혜성을 타고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태우고 천국으로 가는 별이랬지?
이번엔 직접 빛의 사원으로 가서 엄마의 명복을 빌래. 도와줄 수 있어 아수라?”
레나가 물었다. 눈물로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왠지 기뻐보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전투를 해서 에너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비행선을 고르시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아수라.”
레나는 조종실 중앙의 크리스탈을 다시 꼭 안아주며 말했다.
“황후의 영혼을 천국으로….”
아수라가 말했다. 레나는 아수라가 정말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늘 궁금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함께 했고, 지금은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친구이기에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늦은 밤, 발코니에 나와 레나는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비행복 차림의 복장이 그녀의 가녀린 몸매를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윤기를 품고 허리까지 출렁이는 그녀의 머리결이 바람에 천천히 흩날리고 있었다. 레나는 손 위에 올려져있는 보석함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어머니의 유품인 ‘일월쌍환’이 놓여져 있었다. 한 쌍의 반지는 오묘한 광채를 내뿜으며 빛을 내고 있었다. 레나는 한동안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보석함을 닫고 품속에 챙겨넣었다.
“아수라 난 준비됐어.” 레나가 말했다.
“그럼 비행선으로 오르세요.” 아수라가 말했다.
레나는 몰래 황궁 앞마당에 세워놓은 비행선에 올라탔다. 다행히 경비병들에게 발각되지는 않았다.
“아수라, 갔다올께. 이제 보내줘.”
레나의 말이 끝나자 비행선이 섬광과 함께 발진하는 듯 하다 이내 사라지고 말했다. 비행선이 있던 자리는 텅빈 채 잔광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소리에 놀란 경비병들이 달려오다가 멈춰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아수라의 트랜스포테이션이야!” 경비병이 잠시 두리번 거렸다.
“그럼 폐하가? 아니.. 아! 공주마마!” 경비병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