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후, 가이아를 창조한 위대한 영웅 가빈 선장은 위대한 농부가 되어있었다. 첫 추수가 시작되었을 때, 선장은 직접 만든 낫으로 밀을 수확했다. 율리시스 웰은 싱그러운 곡물 냄새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졌다. 이 작은 세상은 너무나도 포근해서, 우리를 약하게 만들 것 같았다. 마침 곁을 지나가던 가빈 선장에게 웰은 말했다.
“세상이 작아진 만큼 우리의 후손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될거에요.
나중에 우리의 아이들이 넓은 세상에 결국 도착해서 겁을 먹으면 어떡하죠?”
“어이~ 걱정대장! 염려 말라구. 아이들한테 우리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면 되지!”
가빈 선장은 쿨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지구에서 살던 이야기를 듣고 꿈꾸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아이들은 자자손손 그 얘기를 들려줄테고, 나중에 가면 우리 이야기는 전설이 되겠지. 언젠가 새로운 지구를 발견했을때 그 전설처럼 해보겠다는 겁대가리 없는 녀석들이 나타날테니 걱정하지 말게.”
웰은 가빈 선장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깨달았고, 대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줄 회고록을 짓기로 마음 먹었다.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써서 남기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리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회고록 집필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가 적은 모든 것은 그 글을 읽는 그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전설로 남게 되었다.
‘우린 언젠가 날개를 접고 하늘에서 내려가
대지의 신과 함께 땅을 밟고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넘쳐나는 맑은 물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 불타는 대지와 눈덮힌 산들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린 그것을 신세계라 부르고 신지구라 이름 붙일 것이다.
노래하라! 우리의 아들, 딸들이여!
그날을 위해 위태로운 조각배를 젓고, 타는 듯한 목마름을 견뎌라.
거친 파도보다 더 큰 외로움을 이겨내라.
맹세하라!
새로운 땅이 보이거든 용감하게 큰 걸음을 내딛겠노라고.
비록 무서운 맹수와 그보다 더한 두려움이 있어도 이겨내겠노라고.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기함 아케론호 초대 항해사 율리시스 웰의 회고록 중 마지막>
그리고 일만년의 세월이 흘렀다. 누마미스는 방금 작업을 마쳤다. 우주복의 남은 산소량은 아직도 충분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일이 끝나버렸다. 사실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안전줄을 당겨 해치쪽으로 미끄러지듯 유영을 해서 해치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탕! 탕! 탕!”
안에 있는 클라단이 문을 열어줘야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누마미스는 해치쪽에 바짝 붙은채 유리창에 얼굴을 내밀었다. 빌어먹을 클라단은 등을 돌린채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벌써 세번째였다. 이제 방주에는 새로 볼 책도 없을텐데 그는 늘 책에 파묻혀있었다. 누마미스는 더 세차게 해치를 두드렸다. 그제서야 클라단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들었어.”
“젠장. 밖에서 3분이나 있었다구!”
“미안, 정말 미안해… 제발 보고서에는 적지말아줘.”
클라단은 쩔쩔매면서 사과를 반복했다. 누마미스는 살짝 장난기가 돌았다.
“좋아~ 그럼 식사를 보고 생각해보지.”
클라단은 빠르게 서랍에서 식량봉투를 꺼내 예열기에 넣었다.
“금방 준비해 줄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우주선 상태는 어때?”
여전히 클라단은 누마미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안테나가 부서지진 않았어. 아마도 작은 운석이였던 것 같아.”
“수리는 잘 끝난거야?”
“아니 부품이 맞는게 없어서 다시 만들어야 해. 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누마미스는 3D 프린터에 고장난 파트를 넣고 계기판을 터치해 스캔을 시작했다. 파괴된 부분을 새로 디자인해서 보강한 뒤 다시 출력을 해야만했다. 재활용품으로 만든 파우더의 품질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수 천번도 넘게 만들고 부서지면 다시 재활용하고 있는 형편이라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자! 여기 대령했습니다요.”
클라단이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소금이 뿌려진 감자 한 조각이 전부였다.
“젠장, 목숨을 걸고 수리하러 갔다온 항해사한테 감자라니, 와인이라도 한 잔 준비해 줘야하는 거 아냐?”
누마미스가 접시를 보고 투정을 부렸다.
“그래도 항해사라 감자지. 다른 사람들은 인스턴트 블럭이라구.”
클라단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읽던 책을 집어들었다.
“아무튼 챙겨줘서 고마워. 그런데 뭘 보고 있었길래 문 두드리는 것도 모른거야?”
“초대 항해사의 일기”
클라단은 책 표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 책이라면 누마미스 역시 어렸을 때 몇번을 본 적이 있었다. 클라단이 저 책을 보고 있는 것을 그동안 수 십번도 더 봤다. 활자중독같으니라고.
누마미스는 감자를 입에 넣고 씹으며 창 밖을 쳐다보았다. 우주선의 날개 부분이 보였다. 그 동안의 오랜 항해로 우주선의 표면은 엄청나게 많은 긁힌 흔적들로 가득했다. 어떤 부분은 강화타일이 떨어져나가 철판으로 몇번이나 덧대어져 작은 충격에도 금방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휴~ 우리 우주선은 얼마나 버텨줄까….”
“글쎄….”
밥을 먹다말고 푸념을 하는 누마미스에게 클라단은 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오랜 우주 생활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방주의 불문율 중 하나는 사람이 말을 하면 반드시 대답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 어떤 병보다 심각한 것이 우울증이였기 때문이였다. 실제로 어느 우울증 환자가 벌인 자살소동에 방주 전체가 폭발할 뻔한 사건도 있었다. 누마미스가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클라단은 누마미스의 혼잣말에도 습관적으로 대답을 잘 해주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이란게 있기는 한걸까?”
“있겠지! 우리 은하에만 생존 가능한 행성은 100억개도 더 된다구.
뭐 옛날 영화에서 나오는 워프라던가, 웜홀 같은 걸 이용해 휙 타고 그냥 갔으면 좋겠다.”
“웜홀이라….”
누마미스가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우린 비슷한 걸 발명했잖아.”
클라단이 책 읽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테이블에 엎어놓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누마미스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작은 지구, 가이아.
어쨌든 가고 있잖아. 천천히라도. 니가 먹은 감자도 거기에서 나온 것이고…
내가 못간다면 좀 그렇긴 하지만, 뭐 나중에 내 아이들에 아이들에 아이들이 간다면 내가 간걸로 치면 되는거지.”
클라단이 웃으며 말했다.
“듣고 보니 그렇네.”
“한 세대에 안된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어. 비록 부품이 잘 맞지 않더라도 말이지.”
지익지익 소음을 내며 안테나 부품을 찍어내고 있는 3D 프린터를 보며 클라단이 말했다.
“삐익~ 삐익~ 삐익~”
그 때였다. 자동 항해 시스템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누마미스와 클라단이 황급히 콘트롤 패널쪽으로 달려갔다.
“이 신호는 뭐야? 처음 듣는 알람음인데? 우주선이 빨라지고 있어!”
“블랙홀인가? 아닌데…. 어디 근처에 항성이라도 있는거야?”
“조정버튼을 잠궈놨어?” 누마미스가 물었다.
“아니!”
“우주선이 끌려가는 것 같아. 조종이 안돼!”
클라단은 서둘러 비상버튼을 눌렸다. 둘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였다. 우주선 곳곳에 비상등이 켜지고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클라단은 그동안 기록에서나 보아왔던 코드 제로를 직접 발동한 것이였다.
우주선이 미지의 힘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을 무렵, 경보음을 듣고 사람들이 조종실로 몰려왔다. 그 중에는 기도실에서 6개월째 묵상을 하고 있던 현자인 아스테라 대수도사도 있었다. 90살이 넘은 그 역시도 처음 겪는 상황이였다.
“무슨 일이냐.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거라.”
아스테라가 누마미스에게 물었다.
“우주선을 조종할 수가 없어요.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습니다.”
“블랙홀은 아니더냐?”
“분명 블랙홀은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아까부터 계속 분석해봤는데, 속도가 점점 빨라지다 느려지다를 반복하고 있어요. 이건 분명 인위적으로 끌려가고 있는거에요!”
누마미스가 힘주어 말했다. 자연발생적인 중력이라면 힘이 변하지않아야했다. 아스테라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가 누군가에게 붙잡혀 가고 있다는 거냐?”
“네. 그렇습니다.”
아스테라를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누구도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창밖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텅빈 우주 공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였다.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을 알아냈어요!”
잠시 후,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분석을 하고 있던 클라단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어디야? 어떤거야?”
누마미스가 클라단에게 다가갔다. 클라단이 모니터에 떠있는 우주 지도 중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다행이도 행성이야.”
클라단이 가리키고 있는 지도 화면에는 행성임을 알려주는 초록색의 점이 찍혀있었다. 아직 멀어서 제대로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행성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누마미스의 제보로 인해 방주의 지도층과 핵심 승무원들은 모두 수도원의 유리돔 아래 모여있었다. 그들의 선조는 러시아에서 비롯되었으나, 출발 직후 각종 사고들로 인해 아프리카와 중동쪽의 사람들이 더 많이 살아남음으로써 만년의 세월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그들의 피부색깔은 구리빛에 가까워지고 대부분 갈색의 눈동자를 가지게 되었다. 유리돔에는 그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행성의 화면이 떠있었다. 지구를 연상시키는 푸른 별이였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기쁨이 아닌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누마미스는 답답했다. 이 작은 방주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는게 이토록 힘든 일인지 몰랐다. 사람들은 쉽게 용기를 내지 못했고 저마다 수근거리거나 중얼거릴 뿐 아무도 그의 말에 동의를 하고 나서지 않았다.
“자그마치 만년 만에 우리가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한 거라구요!”
누마미스가 다시 한번 말했다.
“저기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잖소. 무엇이 있을지 알 수도 없는데 우리 세상을 파괴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나가잔 말이오?”
수도원의 경호를 맡고 있는 프라하스가 말했다.
“그럼 남겠다구요? 여기 남으면 어떻게 될까요?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일 이 방주에서 눈을 뜬다면, 다시 날아오는 유성들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미래를 걱정하며 평생을 살아야합니다. 클라단이 소매를 걷고 자신의 팔에 있는 파르의 문양을 보여주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용기를 낸다면, 이 빌어먹을 파르에 의지하지 않고 가슴으로 마음껏 숨쉴 수 있다는 뜻이지요. 추수한 것들과 그것을 나눌 사람 숫자를 헤아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요. 이제 우리가 싸지른 오줌을 정수해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가 낳을 아이들을 더이상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요.”
클라단의 말에 아무도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불문율대로 무언가 그의 말에 대답을 해야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할지 퍼뜩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끌려가면 안되는거 아닌가….”
가이아를 담당하고 자원부에 속한 듀발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끌려가는 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누마미스가 거들었다.
“안하는 건 아니고?”
훔이 말했다. 그는 듀발과 같은 자원부 소속이자, 오로바스의 일족이였다.
‘가이아’ 선단은 오랜 세월동안 직업별로 종족과 유사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어서 그들 사이에는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갈등하곤 했다. 특히 항해를 맡고 있는 아가레스 족과 공기와 식량을 책임지는 오로바스 족이 가장 세력이 강했는데 그들은 늘상 으르렁거리곤 했다. 훔은 아가레스 일당들이 방주들을 행성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뭐라구요?”
클라단이 흥분해서 훔을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한대 칠 것 같은 표정이였다. 평소엔 긍정적이고 명랑한 그였지만 성질이 급하고 다혈질인 것이 흠이라면 흠이였다. 누마미스는 클라단의 어깨를 누르면서 진정을 시키고는 말했다.
“할 수 있으면 진작 했겠죠. 그래서 더욱 이 지긋지긋한 유랑을 끝내야합니다.”
잠자코 쳐다보던 다른 이들이 한마디씩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부분 오로바스 족들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난 이 곳에 남고 싶어요. 여기엔 집도 있고, 밭도 있고 살 곳이 다 있는데, 저기서 나쁜 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해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가축들을 돌보는 이엘이 말했다.
“파르가 있어서 병에 걸릴 염려는 없어요.”
의사인 아나타가 무심히 대답했다.
“조사결과 공기도 깨끗하고 숲과 들판과 심지어는 바다도 있데요.”
보급품 관리를 담당하는 네론은 오로바스 소속이였지만,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게 낭만적인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구. 가이아는 한번 내려가면 절대 우주로 다시 나올 수 없단 말이야. 지금 우리 기술로는!”
듀발이 네론을 한심한 듯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듀발의 말은 사실이였다. 우주선이 회전하는 힘으로 생성되는 인공중력 기반에서 조성한 가이아는 대기권 진출입 같은 극심한 중력 변동을 버틸 수가 없었다..
“듀발, 자네 말이 맞네. 게다가 괴물들이 득실대면 어쩔건가?”
훔은 듀발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항상 듀발의 의견을 따랐다. 그는 듀발의 말에 경망스럽게 맞장구를 쳐댔다.
“설령 괴물이 있다면 같이 맞서 싸우면 되지요. 게다가 우린 테이밍도 할 수 있잖아요.”
클라단이 말했다. 그동안 가이아 선단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생체기술인 ‘파르’를 발전시켜 오면서 극한의 우주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육체적 능력 이외에도 고도의 정신 능력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그 정신 능력 중 하나가 바로 동물과 교감하고 원하는대로 동물을 길들일 수 있는 ‘테이밍’ 기술이였다. 그들은 ‘테이밍’을 이용하여 가축들을 보다 폭넓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애완동물과 깊이 교감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았다.
“그건 우리가 잘 아는 동물이니까 가능한거지.” 듀발이 딱 잘라 말했다.
“맞네, 자넨 정말 마음에 드는 소리만 하는군. 무책임한 아가레스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훔이 미소를 지으며 듀발을 치켜세웠다. 클라단은 화가 부글부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억지 주장만 피고 있는 듀발과 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들도 밖에 나가서 고장난 우주선을 하루라도 고쳐보고 이야기하란 말야.
우리가, 이 우주 방주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는 지 말이야!”
클라단이 말했다. 듀발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희도 그럼 이 가이아가 어떻게 음식과 산소를 만들어내는지 해봐.
뭐 할 수나 있다면 말이야.”
“지금 그런 말싸움이나 할 때입니까?”
보다못한 네론이 말리고 나섰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클라단과 듀발은 입을 다물었다.
“저기요! 잠깐만 주목해주세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누마미스가 아스테라쪽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해보시게.”
조용히 듣고 있던 아스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누마미스에게 쏠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주에 모인 적도 없고 그들 모두에게 진지한 시건을 받는 경험이 처음이어서인지 누마미스는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하지만 누마미스는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얼마전 클라단이 읽던 율리시스 웰의 회고록의 마지막 문구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누마미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전 아케론호의 96대 항해사입니다. 제 선조께서는 여러분들도 잘 아는 가빈 선장을 보조하셨죠. 네, 그 가빈 선장이요. 우리의 구세주이자 전설적인 영웅이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역사적 사명을 내리셨어요. 멸망한 지구를 떠나, 새로운 지구를 찾아서 그곳에서 다시 인류문명을 재건하라는 사명을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기서 머뭇거리는 분들을 우리 조상님들이 보았다면 무척 화를 내셨을 겁니다.”
누마미스는 오른손을 들어 천정의 돔에 비친 행성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길 보세요. 저기 있는 저 푸른 별을 보란 말입니다. 저게 바로 신이 내린 진정한 선물이에요. 지금이야 말로 선조들의 염원을 이룰, 자그만치 만년만에 찾아온 기회란 말입니다.”
누마미스의 말이 끝났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각자 나름의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라미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였다.
“우린 언젠가 날개를 접고 하늘에서 내려가
대지의 신과 함께 땅을 밟고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넘쳐나는 맑은 물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 불타는 대지와 눈덮힌 산들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린 그것을 신세계라 부르고 신지구라 이름 붙일 것이다.
노래하라! 우리의 아들, 딸들이여!
그날을 위해 위태로운 조각배를 젓고, 타는 듯한 목마름을 견뎌라.
거친 파도보다 더 큰 외로움을 이겨내라.
맹세하라!
새로운 땅이 보이거든 용감하게 큰 걸음을 내딛겠노라고.
비록 무서운 맹수와 그보다 더한 두려움이 있어도 이겨내겠노라고.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율리시스 웰의 회고록에 피터 가빈 선장이 곡을 붙여서 모든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늘 듣고 자랐던 노래였다. 라미는 나즉히 노래를 시작하였지만, 어느새 노래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이나자. 다들 숙연한 마음이였다. 아스테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고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각자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서로를 욕하지 않게 가이아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각자의 자유의지로 결정합시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우리는 하나로 뭉쳐서 싸웠기 때문에 지금껏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저는 땅을 밟겠습니다!”
아가레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저도 아버지한테 그 노래를 배웠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이번엔 오로바스 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또 누군가 외쳤다.
사람들의 외침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아스테라가 손을 들어 기원을 시작하려 하였다. 모두들 그제서야 입을 다문 채, 두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합의에 다다르는 순간이였다.
“가이아시여! 우리를 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