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더스 선단이 구조한 수십만의 난민들에게 거대기업들의 연합체인 엑소더스 이사회는 플랜트 사용료를 인원 수대로 청구했다. 이미 지구 시절 국가 경제가 대부분 무너졌으므로 초기 난민들이 사용료를 낼 수단은 금이나 은 따위의 귀금속이나 현물 뿐이였다. 사용료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였다. 일부 부자 난민들은 사용료를 간단하게 지불하고 거대 기업을 지배하는 엘리트들의 호화롭고 부유한 사회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난민들은 제시된 사용료를 낼 여력이 없었다.
이에, LOPE은 그들에게 돈을 대출해 주면서 이자를 받는 등 선단내에서 은행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기업과 난민들은 LOPE이 발행한 전자화페, ED(엑소더스 달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각 기업들은 그 돈을 받고 비축한 생필품들을 팔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랜트는 ED를 중심으로 한 유통, 금융, 서비스업들이 생겨나 지구와 유사한 형태의 시장경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난민들은 아무리 일을 해도 LOPE의 대출금 이자만을 간신히 갚을 수준의 돈밖에 벌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난민들은 이를 ‘노예대출’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기업들이 채운 족쇄로 받아들였다. 결국 불만이 폭발한 난민 노동자들이 플랜트의 거주구역에서 한차례 폭동을 일으켰다. 거대 기업의 사병들은 치안을 명분으로 이를 강제로 진압했다. 이를 계기로 기업들은 LOPE의 주도하에 ‘당근과 채찍’ 작전을 구사했다. 채찍은 강력한 치안규칙으로 기업의 사병들에게 경찰의 지위를 부여하여 난민을 구금하고 통신장비를 도청할 수 있는 규칙을 이사회에서 통과시킨 것이고,
당근은 바로 미디어 산업의 육성이였다. 거대 기업들 중에서는 과거 지구에서 미디어를 주름잡았던 회사들도 있었다. 그 회사들은 다른 기업들의 지원하에 선단내에 방송국을 만들어 난민들을 위한 오락방송을 내보냈다. 이 방송국의 목적은 쾌락을 추구하는 자극적인 프로그램들과 희망에 가득찬 뉴스만 제공하는 것으로, 처음에 저항하던 난민들조차 점점 이에 빠져들면서 저항은 차츰 사그러들었다.
로버트와 발모어는 이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이사회를 통해 거대 기업의 횡포를 막으려 노력해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들은 제외한 기업들은 로트필드 남작의 영향권에 있었다. 로버트는 몇번이고 그를 찾아가 노예 대출에 대한 비인간적인 상환 독촉을 중단하고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도록 설득하였지만 남작은 매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능글맞게 넘어갈 뿐이였다. 그럴 때마다 로버트는 좌절하여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하고 싶었다. 치미는 분노에 무력 투쟁이라도 불사하고 싶은 마음이였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네.”
발모어가 흥분한 로버트를 진정시켰다.
“무슨 때를 기다리란 말입니까!”
흥분한 로버트가 소리를 질렀다.
“자네 말대로 무력을 이용하여 기업들을 상대로 무력 투쟁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러다 플랜트에 심각한 손상이라도 가면 어찌할텐가? 저들에게 그나마 생존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플랜트 밖에 없다네. 플랜트가 파괴되면 남은 건 멸망뿐일세. 다같이 망하는 것을 바라는 건 아니지 않는가….”
“저도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로버트가 한풀 꺽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민들을 도울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구. 분명히 자네는 할 수 있을걸세.”
로버트는 발모어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로버트는 플랜트 곳곳을 돌아다니며 노예와 같이 전락한 난민들의 생활을 둘러보고 그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해박한 건축 지식을 활용하여 열악한 주거공간을 개선하기도 하였으며, 의료진을 설득해 무상진료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혼자서라도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거대 기업의 횡포를 근원적으로 막을 힘이 로버트에겐 없었다. 로버트는 차츰 절망에 빠져 나중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악순환을 방관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무기력해져 있는 버튼에서 어느날 발모어가 연락을 취해왔다. 그는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저들의 룰을 이용해 이기는 걸세.”
“룰이라구요?”
“이사회 말일세.” 발모어는 확신에 찬 어조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난 아직도 이사회 의장일세. 왜 그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려 하는 걸까?
바로 로트필드의 판단이지. 내가 사람들에게 플랜트의 창시자로 존경받는다는 걸 아니까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는거야. 의장의 권한은 안건을 상정하는 것일 뿐, 이사회 지분의 과반수 이상을 저들이 갖고 있는 한 나는 아무런 힘이 없다네.
그렇다면 저들이 하는 짓을 멈추려면 어떡해야 할까?”
발모어가 물었다. 로버트는 뻔한 질문을 해오자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이사회에서 우리가 과반수를 차지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
“그것을 실현시켜줄 사람들이 있네.”
로버트의 말을 발모어가 끊으며 말했다. 발모어는 개인용 단말기를 꺼내들었다. 엑소더스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통신기기였다. 발모어는 그걸 조작하여 어떤 영상 하나를 틀기 시작했다. 그것은 플랜트의 곡물 생산시설에서 벌어진 시위를 몰래 녹화한 것이였다. 그 시위의 플랭카드에는 ‘바이오트론’이라는 이름이 쓰여있었고, 몰래 촬영된 영상의 오른쪽 모서리에는 해골 마크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기업들에게 대항하는 어느 해적 방송국의 화면이 틀림없었다.
“아!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마 파이럿츠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로버트가 기억이 난 듯 말했다. 발모어는 단말기를 내려놓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저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주게.”
바이오트론은 발모어 회장의 소유인 베데스다 유니버셜의 식량 생산 플랜트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결성한 노동조합이였다. 발모어는 베데스다 유니버셜이 고용한 노동자만큼은 인도적인 대우를 해주었고, 월급을 충분히 지불하여 노예 대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그 덕에 이 곳 노동자들은 다른 이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발모어는 뒤에서 은밀하게 이들을 지원해온 것이였다.
베데스다 유니버셜의 바이오트론을 본따 다른 회사 노동자들도 바이오트론이란 이름의 조합을 속속 결성했는데, 발모어조차도 이렇게 빨리 바이오트론 조직이 플랜트 전반으로 신속하게 퍼질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개인 통신장비를 기반으로 한 파이럿츠라는 해적방송이 그 원인이였다. 이 해적방송은 바이오트론의 존재와 활동을 플랜트 내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전달했고, 이를 본 다른 노동자들이 용기를 내어 하나둘씩 바이오트론을 만들게 된 것이였다. 그들은 베데스타 유니버셜의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을 누리는 이유가 바로 바이오트론 덕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예리한 눈을 가진 사업가답게 발모어는 다른 기업들이 바이오트론의 존재에 당황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미처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리하여 과감한 기습작전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였다.
발모어의 계획은 이러했다. 기업들이 대처하기 전에 플랜트 내에 있는 모든 바이오트론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들에게 자본을 모으게 한 다음 합법적으로 이사회에 지분을 갖고 진출을 하도록 해서 이들과 함께 과반을 차지하는 방법이였다. 이것은 거대기업들이 그동안 이용해왔던 이사회라는 지배시스템을 역이용하여 허를 찌르는 방법이였다.
“그런데, 기업들이 과연 바이오트론의 이사회 진출을 받아들여줄까요?”
로버트가 의문을 제기했다. 발모어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자네가 필요한거야.”
“네?” 로버트가 되물었다.
“에덴랩이 있지 않는가?”
로버트는 그제서야 발모어의 계획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지만 오히려 정신은 더 맑아지고 있었다. 플랜트가 건조될 당시 만들어진 플랜트 이사회는 자본을 투자한 남작의 LOPE과 발모어의 베데스다 유니버셜, 그리고 세계 굴지의 거대기업들이 그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로버트의 에덴랩이 설계에 참여하면서 공헌의 대가로 지분을 조금 받음으로서 에덴랩도 엄연한 이사회 소속 기업이 되었다 만일, 바이오트론이 통합을 한 후에 에덴랩과 합법적인 합병을 한다면, 통합 세력의 이사회 진출을 다른 기업들이 막을 명분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발모어 계획이였다. 발모어는 로버트에서 설명하는 내내 마치 젊은이처럼 에너지가 넘쳤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정이 살아 숨쉬었다.
“그렇게 되면 이사회에는 제 3의 세력이 등장하는 거야.
노동자들 또한 자본을 가지고 있으니, 바이오 트론의 조직력을 동원해 자본을 모으면 우리는 지분을 얻을 수 있겠지. 단 1%의 지분만이라도 새로 확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겠지요.”
로버트가 발모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자네가 그걸 해줘야겠네. 그동안 난민들과 함께 있었으니까 자네가 적격이야. 할수있겠나?”
로버트는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로트필드에게 한방 먹일 수 있다면, 이 잘못된 일을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겁니다.”
로버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면 됐네.”
발모어는 여기까지 말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가슴을 움켜잡았다. 감정이 격해졌던 탓에 심장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그동안 자기가 쓰고 있던 냉정한 기업가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믿는 신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였다. 그 원인은 바로 죄책감이였다. 로버트가 내내 갖고 있던 것과 같은 마음이였다. 우리가 만든 이 세계, 플랜트를 처음 구상했던 늙은 회장이 말했다.
“일을 이렇게 만든데는 나한테도 책임이 있네. 우리는 꿈을 꾸었지만 부득이하게 악몽이 되었지. 전부터 내내 자네한테 사과하고 싶었네.”
“아닙니다. 피터, 나 또한 책임이 있습니다. 플랜트를 만든 건 나에요. 당신하고 함께요.”
로버트는 발모어의 어깨를 토닥였다. 갑자기 이 노인이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이였다. 지구를 떠나 인류가 여기까지라도 올 수 있었던 것은 발모어의 역할이 컸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항상 로버트를 배려해주었다. 그 덕분에 자신이 이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신이 발모어 대신에 무거운 짐을 맡아야겠다고 결심이 들었다. 드디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시간이 오게 된 것이였다.
로버트는 신중을 기해 바이오트론 지도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지도자들은 거대 기업들을 혐오했지만, 발모어 회장과 버튼박사에게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플랜트의 창시자 중 하나로서 버튼 박사는 바이오트론 조합원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역할을 하는데 적격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운 일은 아니였다. 각 바이오트론 조합의 이해관계를 맞추는는 것은 인내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해결할 수 있는 어려운 과제였다. 거기다 바이오트론이 노동자들의 돈을 한 푼씩 모은 자본금을 LOPE 몰래 하나로 합치는 과정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하는 위험한 작업이였다. LOPE가 눈치를 챘다가는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로버트는 발모어에게 전술을 배워 하나 둘 해결해 나갔다. 발모어의 풍부한 사업 경험은 로버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로버트는 각 지도자의 공통적인 관심사를 파악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금을 하나로 모으는 펀드를 개설해 LOPE의 은행계좌가 아닌 베데스다 유니버셜 소속의 개인은행 비밀계좌에 예치해두었다. 그러나 로버트와 발모어의 계획은 우연찮게 그들을 감시하던 LOPE의 하수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남작은 이것을 도리어 발모어와 로버트를 이사회에서 물러나게 만들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이 합병은 발모어 회장이 노동자들을 조종하려는 의도로 벌인 일입니다.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기업들의 노동자까지 자신의 원하는대로 움직여서 플랜트를 장악하려는 고도의 술책입니다.
언제까지 우리 노동자들이 발모어에게 매번 이용만 당할 것입니까?
반드시 막아야합니다. 발모어의 더러운 공작에 더이상 속아넘어가면 안됩니다!”
남작에게 돈으로 포섭된 바이오트론의 지도자 중 하나가 로버트와 바이오트론 지도자들의 비밀 회의장에서 큰 소리로 소란을 피고 있었다. 그는 발모어가 로버트에게 보낸 전자우편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가짜였고 로버트가 그렇게 혐오했던 거대 기업들의 수법처럼 악의적이였다. 로버트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명백한 조작입니다!” 로버트가 나머지 지도자들에게 항변했다.
“발모어가 바이오트론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버튼 박사, 당신도 이사회의 일원이잖소. 박사같은 사람이 우리 노동자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소?”
한 번 시작된 의심이 점점 번져나가고 있었다. 하나둘씩 로버트와 발모어에게 불리한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로버트는 답답했다. 자신의 진정성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딱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결국 바이오트론의 지도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몇 달 동안 매달려왔던 노력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된 순간이였다. 거기다가 이 사건이 언론에 유출되면서 ‘발모어 회장의 추악한 음모’ 라는 제목으로 전 플랜트와 우주선에 중계되었고 기업들은 보도 내용에 크게 격분하였다. 그동안 이사회를 공정하게 운영하였다는 평가를 받던 발모어 회장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이였다.
LOPE 소유의 언론으로부터 보도를 접한 로버트는 이것이 모두 남작이 꾸민 계략임을 알아차렸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기업들은 이사회를 통해 발모어를 의장직에서 탄핵하기로 결의했고, 그 결의안은 남작이 앞장섰다.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의장 직무가 정지된 발모어는 탄핵을 위한 상세 조사를 받는다는 명분 하에 LOPE의 사병들로부터 연금을 당했고, 로버트는 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 로버트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만 하는 상황이였다.
로버트는 자신의 숙소에서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남작의 수하들이 계속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컴퓨터로 플랜트의 보안시설을 해킹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보는데 열중했다.
“이것은!”
플랜트의 CCTV 화면들과 보안기록들을 살펴보던 로버트의 시선이 멈추었다. 남작의 하수인들과 바이오트론의 지도자들이 만나는 영상을 찾고 있을 때였다. 이미 영상은 지워져서 그 증거영상을 찾기 힘들었지만,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남작 일당이 증거인멸을 위해 문제의 영상 파일을 삭제하기전에, 누군가가 해킹으로 해당 파일을 카피해갔다는 흔적을 찾은 것이였다. 해커는 흔적을 지우는데 상당한 노력을 했으나 차마 로버트까지는 속일 수 없었다. 로버트는 자신이 심어둔 트래킹 시스템을 사용하여 해커를 추적하는데 성공했다. 해커의 정체는 바로 발모어가 보여주었던 해적방송의 주인공인 ‘파이럿츠’였다.
로버트는 엑소더스 선단 내부의 인트라망을 뒤져 파이럿츠와 연락할 채널을 찾아나섰다. 파이럿츠가 개인인지 단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작 또한 그들을 쫗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인트라넷 곳곳에 파이럿츠를 잡기위한 함정을 파두었지만 파이럿츠는 유유히 빠져나간 흔적만이 가득했다. 로버트는 파이럿츠가 갈만한 곳에 미리 자신의 메시지를 심어두기로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였지만, 발모어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영상이 반드시 필요했다.
‘버튼 박사, 왜 나를 찾는거지?’
일주일만에 파이럿츠가 로버트에게 비밀 메시지를 보냈다.
‘꼭 만났으면 합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난민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일이에요. 아니, 플랜트 전체를 위한 일입니다.’
로버트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게 함정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믿지?’
‘그쪽에서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말하세요. 저 혼자 나가겠습니다. 제발 진심을 믿어주세요!’
‘오늘 밤 8시. D242 구역 시장 중앙 통로’
‘당신을 어떻게 알아보죠?’
상대는 대답없이 일방적으로 접속을 끊어버렸다. 로버트는 일단 약속장소로 나가보기로 했다. 플랜트에서 자신은 이미 유명인이니 그쪽에서 먼저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D242 구역은 빈민가였지만 거주자들이 가장 많고 암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편이였다. 로버트는 인파 속에서 파이럿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튼 박사?”
허리가 굽고 주름살이 많은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로버트가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로버트를 이끌고 좁은 뒷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암시장에서 팔고 남은 물건들과 쓰레기더미들이 한꺼번에 쌓여있는 어두운 곳이였다.
“당신이 파이럿츠입니까?” 로버트가 물었다.
“그렇소.”
노인은 나즈막히 대답했다.
“제가 보기엔 절대 아닌 것 같은데요.”
“어째서?” 노인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적어도 플랜트에서 해적방송을 하려면 영상기술은 물론이고 해킹 실력도 갖추고 있어야합니다. 파이럿츠가 여러명으로 구성된 팀이 아니라면, 당신은 절대 파이럿츠가 아닐 겁니다. 제가 예상하기로는 파이럿츠는 당신보다 더 젊은 사람일겁니다. 아마도 진짜는 이 곳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겠지요.”
로버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레기 더미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시카 휘트너에요. 제시카라고 불러요. 내가 파이럿츠에요.”
파이럿츠의 정체는 놀랍게도 젊은 여성이였다. 낡은 작업용 수트를 입은 그녀는 로버트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파이럿츠 행세를 하던 노인은 슬며시 물러나 말없이 골목을 떠났다. 제시카는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나도 노예 대출의 피해자 중 한명이였어요. 지독한 독촉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죠.
그러다 우연히 그들의 실체를 알게되고, 모두가 알아야한다는 생각에 해적 방송을 하게 되었어요. 지구에서 IT 엔지니어 출신이라 이 쪽은 잘 알아요. 덕분에 쉽게 잡히지도 않았죠. ”
“그 CCTV 영상 지금도 갖고 있습니까?” 로버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 그 뒷돈 주는 영상요? 얼마전에 로트필드 일당들이 수상한 짓을 꾸미는 것 같길래 이곳저곳 해킹으로 뒤져보다가 발견했어요. 그놈들이 왜 노조 지도자들에게 돈을 주겠어요? 분명 뭔가 있다고 생각되서 얼른 카피해놓았죠.”
그녀는 수트의 왼쪽 주머니에서 살짝 디스크를 빼 보여주었다.
“저는 그게 필요합니다. 로트필드가 발모어에게 누명을 씌운거라구요.”
“원래는 방송으로 내보내려고 했는데, 그놈들이 해적방송에서 쓸 수 있는 통신 포트란 포트는 다 막아버려서 이제 방송도 힘들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버튼 박사, 당신에게 덜컥 줄 수도 없고… 난감하네요.”
“그럼 우선 제 얘기를 들어보세요. 디스크는 그 다음에 주셔도 됩니다. ”
로버트는 오랜 시간동안 그녀에게 자신과 발모어의 계획이 포함된 그동안의 일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믿으려 들지 않았다.
“당신을 어떻게 믿죠? 아무리 이 플랜트를 만든 사람이라지만, 당신 또한 이사회의 일원이잖아요.”
“그래요 나 또한 그 일부에요.”
“부정하진 않는군요.”
“지구에 두고 온 친구가 있어요. 이 플랜트를 함께 만든…. 둘도 없는 친구였죠.”
“아….”
제시카는 안타까운 눈빛을 보였다. 그녀 역시 지구에 두고 온 사람들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있어요. 그는 천국에서, 나는 지옥에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든 하자구요.”
버튼은 간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 또한 당신들을 이렇게 만든 로트필드와 거대 기업들을 증오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없이는 우리도 존재하기 힘듭니다. 이게 현실이에요. 그래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함께 그들의 룰을 이용해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그들이 물러나도록….”
“좋아요! 우리 거래를 해요.”
미처 로버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시카가 말을 끊었다. 로버트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대출을 갚기 위한 돈이라든가, 한동안 남작 일당을 피해 숨어 지낼 수 있는 곳과 상당한 돈을 달라는 요구 정도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건을 말해봐요.”
그녀의 부탁은 전혀 뜻밖이였다.
“내가 이걸 주는 대신, 당신 말대로 이사회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다면, 나 같은 사람들이 계속 진실을 알릴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해줘요.”
“어떤 식으로요?”
“모두가 연락하는 통신포트를 개방하면 될 거에요.
그것만큼은 기업들이 가지지 못하고 난민들의 몫으로 만드는 거죠.
그것만이 우리가 기업들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까요.”
“좋아요.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로버트는 그녀의 말에 감동하여 벅찬 목소리로 힘있게 대답했다.
그때였다. 붉은 레이저 불빛이 제시카의 가슴에 겨눠졌다. 로버트가 깜짝 놀라 그녀를 황급히 밀쳤다.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