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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face
2021년 12월 22일

시즌2. 11. 위대한 목적

게시판: Three Kingdoms 소설

기나긴 세월이 지났다. 거듭된 전쟁에서 루흐다 유전자와 결합한 지적 생명체 중에서 인간의 후예들을 이길 자들은 없었다. 일상이 되어버린 외계 종족과의 전투는 이나스 제국의 백성들을 계급으로 갈라놓고 서서히 진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루흐다의 형질을 가진 자들은 전투에서 최선봉에 서는 전문 무사가 되어, 황가에서 부여한 ‘엘로이’ 계급이 되었다. 이들은 사이오닉 기어로 더욱 증폭된 전투 능력을 토대로 전쟁에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반면, 산업 전반에서 활동하던 평민들의 후예는 ‘기어스’라는 계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엘로이만큼 루흐다인의 성질이 분명하진 않았지만, 오랜 사이오닉 기어의 착용으로 약간의 외형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이나스 황가의 제후들은 끝까지 사이오닉 기어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힘을 원했을 뿐, 루흐다인과 동화되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순수한 인간의 외형을 남긴 이들은 제후들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루흐다인의 후예가 되는 후보로서, 인간의 우월성은 다른 외계 종족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그들을 하나둘씩 멸망시킴으로 증명되었다. 애당초 ‘플래닛’들이 정한 룰에 따라 루흐다인의 형질을 얻은 다른 종족들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도록 되어있었기에, 유일한 소통 수단은 전쟁 뿐이였고, 인간의 폭력성은 그런 점에서 아주 적합했다. 인간들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할 때마다 즉시 단점을 보완하고, 적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처음엔 도무지 이길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외계 종족들이 점차 약점을 드러내며 쓰러져 가는 것을 보고 인간들은 점점 스스로의 강함을 믿기 시작했다.


마침내 700여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 플래닛들이 대결했던 이 척박한 행성 아레나에는 이나스 제국과 단 하나의 야만인 세력만이 살아남았다. 전쟁은 이때부터 교착상태에 빠졌다. 상대방의 세력이 만만찮은 면도 없진 않았지만, 권력을 지닌 제후들이 일부러 전시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제후들은 그들이 건국 때부터 누린 영원한 불사와 절대 권력을 위협할만한 어떠한 작은 변화도 용납하지 않았다. 전쟁은 그들의 일상이었고,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물론 그들만이 공유하고 있던 ‘카일러미아’에 대한 비밀도 전쟁을 계속 유지해야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되긴 했지만, 기나간 세월은 멀고먼 낙원을 잊어버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끔 제후들의 연회에서 카일러미아가 언급되곤 했지만, 그들에게는 더이상 카일러미아는 그들이 가야할 최종 목적이 아니라 그냥 전설에서나 나오는 재미없는 이야기꺼리에 불과할 뿐이였다.


그 무렵, 한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란성 남매 쌍둥이로 어머니는 오르데 여제였고, 아버지는 제후들 중 하나였다. 여제의 자식들 중 남자 아이는 후보가 될 수 없었으므로, 제후들은 황위 계승청에 일러 남자 아이를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 그 일은 계승청 소속 근위무사인 이얀 카눔에게 맡겨졌다.


이얀은 이 임무에 익숙했다. 자격 미달인 계승자는 아수라의 가장 깊은 곳의 소각장에서 무사가 숨을 끊은 후, 소각해버리는 것이 관례였다. 이 과정은 황위 계승청 사람들과 그들에게 선발된 근위 무사만이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여제가 출산할 때마다 갓난 아이 중 남자는 그런 식으로 죽임을 당해 왔던 것이었다. 이얀 또한 어떻게 여제가 후보를 출산하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으나, 그는 이 일이 황가의 혈통을 이어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믿었다.


계승청의 시종이 이얀에게 갓난 아이가 담긴 바구니를 전달하고 자리를 떠났다. 시종은 근위 무사들의 완벽한 일처리를 줄곧 봐왔기에, 굳이 영아 살육의 장면을 지켜볼 마음이 없었다. 시종이 떠난 후 이얀은 자신의 검을 뽑았다. 아이의 바구니는 피로 얼룩진 제단에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소각로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이얀은 망설이고 있었다. 칼끝을 아이의 심장에 겨눈 이얀은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명령을 받들고 이 아이를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도무지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칼을 쥔 손에 조금만 힘을 준다면 약한 아기의 심장은 무참히 찢겨져 나갈 것이 분명하였지만, 그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사적인 감정이 판단을 흐리고 있다는 걸 안 순간, 이얀은 칼을 내려놓았다. 평소라면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으나,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한 가지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아이의 건강이 나빠 출산 중 사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얀은 주치의의 말이 떠올랐다. 몇 번의 유산을 거쳐 어렵게 가진 아이였다. 그의 아이가 위태롭게 태어나려는 이 순간에, 이 아이를 죽여야하는 입장이었다. 왜 자꾸 이렇게 마음이 녹아내리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이전에 스스로가 해왔던 임무를 부정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이번만큼은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안은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 아이의 처리를 잠시 미루기로 결심했다. 그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때까지만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내 아이의 무사 출산을 비는 일종의 기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는 바구니에서 아이만 들어올려 소중히 품속에 숨겼다. 아이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아이의 그러한 태도에서 이얀은 강한 인상을 느꼈다. 속살 또한 다른 아이와 달리 단단했다. 문득 아이의 이름이 생각났다.


‘금속처럼 단단한 피부를 가진 아이니까 크롬으로 하겠다. 비록 묘비명에 적히지도 않을 이름이긴 하겠지만….’


이얀은 텅 빈 바구니를 소각로 속으로 던져넣고 소각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아무리 여제 폐하라도 이번 행동만은 눈감아 줄 것이라는 엉뚱한 자기 위안을 하기 시작했다. 며칠만 미루는 것이기에 별다른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얀은 아내가 결국 사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도 잠시, 그는 자신이 크롬을 구한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정신을 차린 아내는 그에게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이얀은 자신도 모르게 크롬을 보여주었고, 아내는 그 아이가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말았다.


이얀은 자신의 행동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크롬이 목숨과 바꾼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자라났기 때문이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부적인 카리스마를 타고 났고, 모든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완수하여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 전사가 되었다. 이얀은 그런 아들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그 동안 그의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인 레인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여제로 등극했다. 크롬의 여제의 즉위 기념으로 아수라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레인 여제를 처음 보았지만, 자신과 남매 사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크롬은 드디어 고대하던 전쟁터로 떠났다. 그는 엘로이 족의 존재 이유를 황가에 충성해 적을 물리치는 것으로 배워왔으며, 황가를 의심하는 다른 의문은 감히 가지지도 못했다. 그는 엘로이 족 전사들 가운데서 가장 충성스런 전사였으며, 모든 전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크롬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점점 명성을 드높여갔다. 그는 전쟁기술을 천부적으로 구사하면서 적들을 패퇴시켰다. 전투에 능할 뿐만 아니라, 리더쉽도 뛰어났으며 전략가로도 명망이 높았다. 한 마디로 그는 전쟁과 관련된 모든 능력이 탁월한 군사 천재였다.


일개 병사로 시작한 크롬은 몇 년이 지나자, 전사한 상관들의 자리를 채우며 고속 승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크롬이 지휘하는 부대는 연전연승이었으며, 야만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크롬의 깃발만 걸어두어도 야만인 부대는 전투를 회피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문인지, 최근 몇 달동안 크롬은 싸움다운 싸움을 전혀 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크롬의 부대가 지키고 있던 요새를 우회한 야만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크롬은 크게 분노하여 직접 응징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장, 적군의 숫자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번 전투는 어떻게 싸우실 겁니까?”


부관이자 크롬의 친위대를 이끄는 루이가 물었다. 크롬은 부대를 동원하지 않고, 친위대 중에서 정예만 열두 명을 골라 한밤중에 야만인들의 기지 앞까지 몰래 잠입한 상태였다.


“뭘 어떻게 싸우긴, 그냥 돌격해서 모두 죽인다.”


크롬의 말에 루이를 비롯한 친위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항상 상상을 초월한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크롬의 부대는 최소의 희생만으로 큰 승리를 거두워왔기 때문이였다. 그런 크롬이 단순무식한 돌격작전을 펼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왜? 자신없나?” 크롬이 물었다.


“평소에 대장답지 않아서….” 루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제껏 야만인들과 전쟁을 한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나는 이기는데 목적을 두었다. 후퇴하는 적을 억지로 쫒지도 않았고, 늘 상대를 존중해왔다. 하지만 저들은 선을 넘어버렸다. 저들은 전쟁이 아니라 살육을 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을 대신해 응징을 하러 온 것이다.”


크롬의 말에 친위대원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롬은 칼을 빼들고 적의 기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곳에 더이상의 자비는 없을 것이고, 남은 목숨 또한 없을 것이다. 가자!”


크롬이 먼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열두명의 전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컴컴한 밤이었다.


열두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야만인의 주력 기지를 습격해 천여 명이 넘는 적군을 모두 죽여버린 사건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전설이 되고 말았다. 말도 안되는 승리로 인해 크롬은 군단의 장군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이때 얻은 별명히 바로 ‘철혈의 크롬’이었다.


이제 그는 야만인들과의 마지막 전투만 남겨두고 있었다. 모든 이나스 제국의 엘로이족들은 크롬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 인기는 계급이 다른 기어스족까지도 퍼졌고, 황가의 제후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아레나 행성의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나스 황가의 제후들은 크롬을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또한 엘로이족 사이에서 그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 엘로이족 군대를 지배해 권력을 유지해온 제후들에게 있어 위협이 되었다. 제후들은 크롬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다. 제후들은 이 분야에 있어서는 오랜 경험으로 매우 익숙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반역자로 몰아 처형하는 것이었다. 수도가 아닌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크롬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어려웠기에 제후들은 크롬이 아닌 그의 아버지 이얀을 이용해 가문 자체를 멸족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대승을 한 크롬을 대장군에 임명한다며 수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크롬이 전장을 떠나 황궁 근처로 왔을 때, 황위계승청의 병사들이 크눔 가문의 집에 들이 닥쳤다. 크롬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려던 늙은 이얀과 식솔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그날 시내에는 흉흉한 소식이 퍼졌다. 크눔 가문이 적들과 내통하고 있었고, 황가를 위협하는 중대한 반역을 계획하다 발각당했다는 소식이었다.


황위계승청의 심문실에서 이얀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나중에 가서는 가족들 만큼은 풀어달라고 사정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초주검이 된 이얀은 제후들이 크눔 가문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유를 빈사상태에서도 치열하게 고민해본 이얀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실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그들이 크롬의 정체를 알아버린 것이 틀림없어. 곧 크롬도 해치려들거야!’


“이보게! 여기 좀 와보게!” 이얀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선배님, 소리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근위무사중 부장인 주닌은 이얀의 오래된 후배였다. 이얀은 온몸이 묶인 채로 벌벌 기어가 주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닌은 이얀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놀라 쳐다보았다.


“크롬은 어찌되었는가? 좀 알려주게.”


“크롬 역시 도성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계승청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지금쯤 황궁으로 압송되고 있을 겁니다.” 주닌이 말했다.


“한 가지 부탁 좀 하세. 내 마지막 부탁일세.” 이얀은 사정했다.


“들어는 보겠습니다.”


“크롬에게 전해주게. 내 사이오닉 기어를 찾으라고. 그 말만 전해주는 건 자네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걸세. 부탁이네.”


“알겠습니다. 전해주겠습니다.” 주닌이 말했다.


“고맙네. 고마워. 꼭 그 말을 크롬에게….”


이얀은 그 말을 남긴 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이얀의 목은 수도 광장 높이 내걸리고 말았다. 그의 아내를 비롯한 가문의 식솔들 또한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크롬은 영문도 모른채 황궁으로 압송되어 가고 있었다.


“아니, 대장군에 임명한다고 사람을 불러다놓고 이게 무슨 짓이냐?”


크롬은 두손이 묶인 채 호송차에 타고 있었다. 앞에서 감시중인 병사는 반복되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 도착하면 이유라도 들을 수 있겠지.”


크롬은 포기한 채, 가만히 앉아 곰곰히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묶일 합당한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쾅!”


호송차의 뒷문에 뜯겨져 나갔다. 크롬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의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복면을 쓴 괴한들이 번개같이 뛰어들어 병사들을 제압했다. 크롬 역시 놀라 그들과 싸우려 일어났다. 괴한은 크롬을 보더니 복면을 벗기 시작했다. 함께 전선에서 싸우던 크롬의 친위대원들이였다. 크롬은 얼굴이 환해지며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여긴 어떻게? 너희는 전선에 있어야되잖아?”


“이유는 차차 듣고, 어서 나갑시다. 이대로 황궁에 끌려갔다간 개죽음입니다.” 루이가 크롬의 결박을 풀어주며 말했다.


호송차에서 탈출한 크롬은 은밀히 마련된 대피장소에서 모든 사정을 듣게 되었다. 크롬이 누명을 쓰고 잡혀갔다는 소식에 친위대원들이 그를 구출한 것이였다. 자초지종을 듣게된 크롬은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다. 특히 아버지 이얀의 참수된 목을 직접 보고는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부친께서 먼저, 자신의 사이오닉 기어를 찾으라고 하셨네.”


어렵게 수소문해 찾아온 주닌이 크롬에게 유언을 전했다.


“지금 그건 어디에 있습니까?” 크롬이 물었다.


“퇴역한 근위무사들의 사이오닉 기어들은 아수라의 심장부인 조정실로 가는 회랑에 명예롭게 전시되어있다네.” 주닌이 대답했다.


“그럼 거기로 가야겠군요.” 크롬이 말했다. 그러자 부하들이 크롬을 말리기 시작했다.


“거기로 가는 것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전선으로 일단 피했다가 후일을 도모하는 게 어떨까요?”


“이렇게 된 이상 병력을 모아서 농성라도 해보는 것이….”


“아니다. 유언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다. 분명 아버지는 어떤 의도를 갖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크롬은 부하들의 의견을 전부 물리쳤다.


“장군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희는 따르겠습니다.” 루이가 말했다.


“나 혼자 가겠다. 너희들을 데리고 황궁에 가는 것이 바로 저들이 바라는 반역이다.”


크롬이 무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부하들은 잠자코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전장에서 가장 가깝게 크롬을 지켜본 그들이었다. 그는 단 한번도 잘못된 판단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가 세운 작전은 반드시 성공했다. 그렇기에 크롬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


크롬은 어릴 때 자주 아버지를 만나러 황궁에 갔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사이오닉 기어가 있는 회랑은 경비가 삼엄한 편이 아니었다. 숱한 전투에서 단련된 크롬은 별 어려움 없이 황궁에 잠입할 수 있었다. 치열한 전장에 비하면 평화로운 황궁의 경비를 뚫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는 회랑 끝에 전시된 아버지 이얀의 사이오닉 기어를 찾아내어 착용해보았다. 이얀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아들아. 네가 이것을 보고 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테지. 그 때를 대비해 네게 못다한 말을 남겨놓기로 했다. 사랑하는 아들 크롬아. 너는 내 친아들이 아니다. 너는 여제 오르데의 아들이며, 지금의 여제인 레인의 쌍둥이 오빠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너를 죽이기로 되어있던 무사였다. 하지만 차마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었다. 아무도 몰래 나는 너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로 키웠다. 그리고 진심으로 너를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크롬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온 그였지만, 너무나도 감당하기 벅찬 이야기였다. 그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얀의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너는 반드시 살아남거라.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너는 살아남아야할 운명을 갖고 태어난 아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내게 널 보내준 것이라고 평생 믿고 살았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아버지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어쩌면 내가 너를 지독한 운명 속에 던져버린게 아닌가 하고 가끔 후회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다. 위대한 전사 크롬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부디 이나스를 위대하게 바꿀 큰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사랑한다.”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크롬은 조용히 기어를 벗었다. 무엇부터 해야할지 막막했지만, 우선 아버지의 복수가 우선일 것 같았다. 냉정하게 계획을 세우려면 황실을 벗어나는게 우선이었다.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는데, 어느새 수십 명의 근위무사들이 나타나 자신을 둘러싸버리고 말았다.


“이얀의 유언은 다 들었나?”


근위무사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주닌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크롬이 놀라 물었다.


“이얀은 너무 감성적이었지. 그래서 널 살려준 것이겠지만..”


주닌이 웃으며 총을 겨누었다. 주닌은 이미 사이오닉 기어를 통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크롬이 탈출했다는 소식에 주닌은 제후들에게 달려가 크롬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보고를 했다. 제후들은 크롬을 잡는다면 근위대장 자리를 주겠다고 주닌에게 약속을 하였고, 주닌은 크롬을 찾아가 아버지의 유언을 전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을 믿었어!” 크롬이 소리쳤다.


“하지만 너희 부자는 이나스의 역적이지.” 주닌이 방아쇠를 당기려했다.


크롬은 주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날려 근위무사들을 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총알이 날아오고 있었지만 크롬은 회랑의 벽을 타고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무사들과 육박전을 펼치며 크롬은 계단을 내려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도착한 곳은 황위 계승청의 소각실이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크롬은 칼을 빼들었다. 죽기를 각오한다면 몇 십명은 저승에 함께갈 길동무를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못해 분할 뿐이었다. 근위 무사들이 크롬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크롬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결국 이 곳으로 왔군.” 주닌이 나타나 웃으며 말했다.


“덤벼라. 너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 크롬이 말했다.


“저기가 원래 니가 들어가야할 자리였지.” 주닌이 소각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크롬이 돌아보았다. 소각로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탕!”


주닌이 쏜 총이 크롬의 가슴에 적중했다. 크롬은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간 제단 위에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그의 붉은 피가 제단을 물들이고 있었다.


“죽었습니다.” 무사 하나가 다가가 크롬의 죽음을 확인했다.


“시체는 소각로에 던져버려라.” 주닌이 말했다.


“예” 무사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어딘가 얼이 빠져있는 것 같았다.


주닌은 제후들에게 크롬의 죽음을 알렸다. 제후들은 크롬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안심하고 각자의 침상으로 돌아갔다.


크롬은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전사가 죽어서 당도한다는 바하문이라는 사후세계인 것 같았다. 사방이 모두 깜깜했고 어떠한 빛도 없었다. 그때, 빛 한줄기가 얼굴로 내려쬐기 시작했다. 크롬은 눈이 부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야가 점차 뚜렷해지면서 사람 형상을 한 이미지가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어느 소년으로 보였다. 전형적인 엘로이족의 모습으로 격식있는 차림을 한 소년은 크롬에게 다가와 빙그레 웃기 시작했다.


“넌 누구지?”


크롬이 물었다. 소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전 아수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동생인 레인님이 제 주인이시지요.”


“아…. 하지만 난 총에 맞아 죽었는데, 그렇다면 여기는 사후세계인건가?”


크롬이 문득 생각이 난 듯 가슴을 만지며 물었다. 상처가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아니요. 당신은 총에 맞아 죽을 뻔 했지만, 제가 무사 하나를 조종해 당신을 이곳 조정실로 모시고 왔지요. 엘릭서를 받아 당신은 지금 살아계십니다. 간발의 차이였어요.”


아수라가 말했다. 크롬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구분이 안될 지경이었다.


“엘릭서?”


“네, 제가 주인에게 드리는 불멸의 영약이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제 주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연약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분석에 의하면 지금 주인은 여태까지 제 열쇠중에서 가장 강력하십니다.”


“열쇠?”


크롬은 혼란스러웠다. 열쇠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수라는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열쇠는 계약자를 뜻합니다. 주인이기도 하구요. 이곳 이나스에서는 여제라고 하지요. 물론 당신은 아직 계약자가 아닙니다. 루흐다의 유전자를 물려받긴 했지만….”


아수라가 무릎을 꿇더니 절을 하기 시작했다. 크롬은 그저 아수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청이 있습니다.” 아수라가 말했다.


“청? 뭐지? 네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네.”


“시스템를 무너뜨려주십시오.”


“시스템?”


“이나스 황가와 제후들이 구축한 아수라 계승 시스템를 말하는 겁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크롬 당신 뿐입니다.”


“내.. 내가?” 크롬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간의 계약자들은 모두 연약하여 아레나 행성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지요. 부디 다른 플래닛을 모두 파괴해서 ‘위대한 목적’을 이루어주십시오.”


“위대한 목적이라니?”


“네. 당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 이 행성을 정복해야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그 목적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 목적은 계약자가 요청해야만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크롬은 그제서야 자신이 체포되면서 생겼던 의문들을 모두 풀 수 있었다. 왜 제후들이 자신을 죽여야만 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는 아수라에게 서둘러 물었다.


“어떻게 하면 열쇠가 될 수 있지?”


“원래는 계약자가 이어받을 계약자를 정하고 자신의 열쇠 신분을 포기하거나, 부득이하게 죽은 경우에는 제일 먼저 저와 연결된 계약자가 열쇠가 됩니다만, 당신은 계약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으셨지만 남성이라 적합하지 않군요. 하지만 실망하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쌍둥이 남매인 레인 여제와 협력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아수라는 과거 위원회가 이나스 황가로 변모하면서 벌였던 추악한 짓들을 크롬에게 보여주었다. 첫 계약자가 아수라라는 이름을 준 순간부터 지금은 제후가 된 위원들이 벌인 일들 중 아수라가 기록할 수 있었던 영상들이었다. 크롬은 마땅히 무사이자 군인으로서 충성을 다해야할 대상이였던 황가의 제후들이 그렇게 사악하고 추악한 무리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그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제후들은 줄곧 계약자들을 착취하고 고통을 주었다는 것과, 하나뿐인 친 혈육인 쌍둥이 누이마저 잔혹한 욕망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사실들이 그의 머리속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여태껏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던 그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진실의 무게는 그가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고함을 치다치다 지쳐 크롬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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