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을 시작한지 천년 동안 엑소더스 선단은 그들의 선조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 기업들의 신형 우주선 건조가 완료되었고, 일부 난민 시절의 우주선들이 장거리 항해를 견딜 수 있도록 개조되었다. 이 우주선들을 엑소더스인들은 ‘순항 우주선’이라 불렀다. 이 순항 우주선들이 플랜트에서 벗어나 활약하면서 플랜트를 중심으로 한 선단의 활동영역은 비약적으로 넓어졌고, 이는 적극적인 우주 개척으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대항해 시대가 엑소더스 선단 앞에 펼쳐진 것이였다.
선단 외부의 우주 공간은 크고 작은 우주선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엑소더스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소행성 지대에서 물과 광물 같은 자원들을 채취하여 선단으로 귀환하는 모험을 반복했다. 특히나 기업의 거대한 우주선들은 각 기업의 모함 역할을 하면서 플랜트 곁을 벗어나 자원을 찾아나서는 등, 우주선 하나 하나가 이동식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게 확보된 자원은 플랜트의 증설과 새로운 우주선을 건조하는데 활용되어 엑소더스 선단의 중심인 플랜트는 역동성이 넘치는 공장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노예로 전락할 뻔 했던 시민들은 이런 모험을 새로운 기회로 여겼고, 오늘날 에르시온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불굴의 의지와 도전 정신은 바로 이때 태동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엑소더스 선단의 대다수 인구는 플랜트의 거주시실에 머물고 있었으며, 이들의 삶은 화려한 모험을 펼치는 주역들에 비해 보잘 것 없었다. 이들 중 새로운 모험을 시도한 일부만이 우주선의 선장이 되어 자신들만의 주거공간을 갖는 사치를 누렸지만, 그것은 복권 당첨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였다.
사회적으로 변화가 생겼다. 선단이 처음 결성된지 이백여년 후 벌인 전체 투표로 이사회는 의회로 변경되었다. 각 기업들은 그들이 가진 지분만큼 의원을 선출하였고, 시민들 또한 바이오트론의 지분으로 의원들을 뽑아 견제했다. 그럼에도 엑소더스 의회는 기업들이 인프라를 거머쥐고 있는 한정된 공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여전히 기업이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성향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창업자들의 후예가 기업의 주도권을 세습하면서 기업의 주인인 명문 가문들이 본격적으로 실력을 행사했다.
이 무렵, 버튼 가문은 여전히 해머 트러스트의 수장직을 유지하면서 엑소더스 선단 내 핵심 주도층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가문의 새로운 후계자는 젊은 워드루프 버튼으로 그의 아버지이자 의장이였던 엔드오프 버튼이 일찍 사망한 탓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의장직을 물려받게 되었다. 의장직은 중요한 직책이였다. 기업들로부터 세금을 걷고 정책을 세우는 것 외에도, 앞으로 선단이 나아갈 곳을 정하는 키잡이 역할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워드루프 버튼은 어딘가 엉뚱한 면이 있었다. 그는 분명 엑소더스인답게 용감하면서도 밝고 총명한 젊은이였지만 엑소더스인들이 살만한 새로운 지구를 찾아내겠다는 일생일대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그의 목표가 마치 동화 속 이야기처럼 허무맹랑해졌다는 것이였다. 선단이 천년에 가까운 항해를 하면서 관측을 했지만 지구와 유사한 행성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역대 엑소더스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지구를 찾는 일이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라고 폄하했고, 순진무구한 사람들이나 꾸는 꿈이라고 여겼다. 나중에 가서는 새로운 지구를 찾아야하는 필요성도 딱히 느끼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이미 그 존재가 막연해진 지구라는 행성 대신, 우주선 내부에 있는 대다수의 시민들은 가질 엄두도 못내는 안락하고 사치스런 주거공간이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장직에 오른 워드루프가 가장 먼저 행한 일은 베데스다 유니버셜의 발모어 가문과 함께 신지구 탐사용 우주선을 건조하는 것이였다. 용감한 자원자들이 이 우주선을 타고 가능성이 있는 행성으로 탐험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워드루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기능이 개선된 새로운 우주선의 건조를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해머 트러스트 내의 가문들에서도 워드루프가 너무 몽상가라는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워드루프의 몇몇 돌발 행동은 코인 트러스트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할 우려가 있었다. 심지어는 버튼가와 가장 밀접했던 발모어 가문조차도 무모한 모험으로 선단의 자원이 낭비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었다.
워드루프가 새로운 탐사선의 컨셉을 가져왔다고 했을 때 레노 발모어는 그의 얼굴을 시원하게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이미 다섯 대의 탐사선을 소행성 지대 밖으로 보냈지만 그들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 위대한 버튼 박사의 후손은 새 탐사선의 개선 계획을 신나서 설명하고 있었다. 레노는 베데스다 유니버셜의 CEO 겸 의회의 우주선 담당관이 아닌, 워드루프의 친구이자 연장자의 입장에서 그를 혼내기로 결심했다.
“네가 설명한 그 반중력 추진 우주선에 대한 건 잘 들었어.
근데 그 얘기는 이미 보낸 탐사선과 통신이라도 된 이후에 하는게 어때?”
레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그렇지. 미안, 나중에 얘기했다가는 까먹을 것 같아서.”
워드루프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레노는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너의 그 이상은 존중하지만 자꾸만 그런 태도를 보이다가는 로드필드가 너를 가만두지 않을거야. 로드필드는 사람들 앞에서 이번 모험을 실패로 규정하면서 너를 공격할만한 능력이 있단 말이야. 넌 이제 의장이니까 이럴 때일수록 처신을 똑바로 하라구.”
“미안해 레노, 내가 성급했나봐.”
정색을 하고 말하는 레노의 말에 워드루프는 당황한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들은 꼭 돌아올 거니까.”
워드루프는 또 금세 표정이 밝아지면서 말을 이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레노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난 그들을 믿어. 그들은 강인한 사람들이고, 정말 열의가 넘치는 영웅들이야.
내가 그들을 강제로 보낸 게 아니란 건 레노 너도 잘 알잖아.
그 사람들은 모험을 하고 싶었어. 내가 그걸 들어준 거고….”
“네가 설레발을 쳤던거 아냐? 아무리 꿈이 좋다지만 좀 자중할 수 없니?
심지어 우리 가문 사람들도 너한테 불만을 갖고 있단 말이야.”
레노가 워드루프를 몰아붙여봤지만 워드루프는 끄덕도 없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워드루프가 말했다.
“내가 이렇게 서두려는 이유는 말이야.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야.
새로운 지구를 발견하고 도착하는 일 말야.
난, 의장직을 갖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해보고 싶어.”
워드루프는 그 순진한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했다. 열의가 살아 숨쉬는 이 젊은 의장을 레노는 더 이상 압박할 수가 없었다. 항복이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어디 그럼 그 반중력 기술에 대해 알아보기나 하자.
에이비오 중공업 기술이라고?”
레노가 물었다.
“응 아직 미완성이지만…. 정말 고마워 레노.”
젊은 의장 워드루프가 붙임성 있게 웃어보였다. 레노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에이비오 중공업이라는 이름을 듣었을 때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워드루프와 에이비오 중공업의 루트반이 매번 그 ‘새로운 지구를 찾는 현실성 없는 계획’ 때문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워드루프가 새로운 지구 탐사에 나선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선조들이 떠난 지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가 배운 바에 따르면 선조들은 광활한 대지를 뛰어다녔고, 큰 집을 짓고 대지의 보살핌 속에서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엑소더스 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여러 족쇄를 차고 인생을 시작했다. 우주선의 좁은 공간에서 살았고, 생존 대출이 세습되었다. 특히나 플랜트에 사는 사람들은 그 문제가 심각했다. 부유층은 여러 우주선으로 이사하여 안락한 환경을 누렸지만 플랜트에 사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지구가 있다면 거기서 살면 될텐데!’
처음엔 이런 막연한 꿈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도 작용했다. 그저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전설로만 지구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뿐 이제는 새로운 지구를 발견하겠다는 걸 다들 포기하고 있었고, 스스로를 지구인의 후예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어린 워드루프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에 실망해 있던 중, 선조들이 지구 유물을 모아 지은 ‘엑소더스 메모리얼 박물관’에서 마음속에 새겨놓을 명언을 발견했다. 엑소더스의 초대 의장이였던 피터 발모어 회장이 죽기 전에 사람들에게 남겼다는 말이었다.
‘불가능을 확신하긴 어렵다. 어제의 꿈은 오늘의 희망이요, 내일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워드루프는 이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워드루프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 플랜트의 존재 자체도 기적이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구.
그렇다면 새로운 지구를 발견하는 것 또한 못할 게 어디있겠어?
내가 꼭 해내고 말꺼야.’
나이를 먹어가면서 워드루프는 그 꿈을 점점 키워나갔다. 새로운 지구를 발견해 그곳에 정착하는 것만이 선단의 여러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을 일깨우고 지구인의 후예다운 해방된 삶을 살도록 하려면 그들에게는 반드시 새로운 고향이 필요했다.
워드루프의 끈질긴 노력으로 대중들은 신지구를 찾는 프로젝트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한 포플리즘이라고 비난하는 부류도 있었지만 워드루프는 개의치않고 꿋꿋히 나아갔다. 그에게는 동지도 있었다. 바로 루트반 메르니라는 청년이였다. 그는 에이비오 중공업의 메르니 가문에 속한 젊은 인재로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새로운 지구에 도착해 드넓은 대지를 누비는 꿈을 함께 꾸고 있었다.
새로운 지구를 발견하는 일과 더불어, 그 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게 선단의 항속 속도를 올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문제는 속도가 느린 플랜트였다. 플랜트가 순항 우주선급 이상의 속도를 내지 않으면 그 새로운 지구로 가기도 전에 물자가 바닥날 가능성이 컸다. 지금까지 엑소더스 선단은 마치 유목민처럼 소행성 무리를 기점으로 해서 이동해 왔는데, 새로운 지구로 가는 항로에 소행성들이 마냥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루트반은 천재적인 기술자였다. 그는 에이비오 중공업이 기술적인 한계에 막혀 중단했던 연구를 이어받아 거의 완성시키는데 성공했다. 바로 ‘반중력 기술’이였다. 반중력 기술을 엔진에 적용하면 엔진의 저항을 소멸시켜 출력을 배가 시킬 수 있었고, 이는 항속거리를 몇십배 이상 늘릴 수 있는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다만 막대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문제 때문에 그들은 이 기술을 실험실에서만 테스트하고 있었고, 코인 트러스트에게 신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워드루프와 루트반은 몰래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강력한 에너지원만 있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워드루프와 루트반은 소행성을 조사하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에너지원이 되는 신물질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반중력 기술을 적용하는 플레이트의 제작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선단의 운영 때문에 바쁜 워드루프를 대신해 루트반은 여러 채광 회사와 접촉해 소행성에서 가져온 다양한 샘플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광물질을 찾고 있다고 그랬소?”
미스코어 채광회사의 총수 보나르가 소파에 기대어 루트반을 삐딱히 쳐다보며 물었다.
“네. 이번에 에이비오 중공업에서 개발중인 신기술에 적용해볼까 하고 찾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 샘플들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저희 회사에 제공해 주실 수 있습니까?”
루트반이 대답했다.
“그 기술이 어떤 기술이지요?”
보나르가 허리를 세우며 다시 물었다.
“새로운 엔진 기술인데, 거기에 쓸 수 있는 에너지원이 필요합니다.”
“엔진 기술이라….”
보나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서며 말했다.
“내일 다시 찾아오시오. 샘플을 준비해서 드리겠소.”
다음날 루트반은 다시 미스코어를 찾았다. 루트반을 맞이한 사람은 보나르가 아니라 보나르의 딸인 실비아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비서직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중에 당신이 찾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실비아가 샘플이 든 가방을 내밀며 웃었다. 루트반은 실비아를 보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방에 든 샘플을 확인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실비아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뭐 더 필요하신 거라도?”
실비아가 무안한듯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루트반은 정신없이 미스코어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연구실로 돌아와 샘플을 열어보니,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다른 채광회사의 리스트를 뒤지면서도 루트반은 계속 실비아의 눈빛과 미소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는 머리를 책상에 쿵하고 박았다.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여자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그때 마침 실비아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회사 샘플이 도움이 되었나싶어 궁금해서 연락했어요.”
“아, 제가 필요한 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루트반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안타깝네요. 다음 번 순항선이 들어오면, 그때 샘플을 만들어서 다시 보내드릴께요.”
“그게 언젭니까?”
루트반이 다급하게 물었다.
“PWA-65소행성 지대에서 오는 거니, 삼일 후에 입고될꺼에요. 샘플 작업은 하루면 가능하구요.”
“번거롭게 샘플 작업할 필요없이, 제가 기기를 들고 벌크를 직접 조사하겠습니다. 삼일 후에 찾아겠습니다.”
“어머, 안그러셔도 되는데…. 그럼 그 날 뵐께요.”
전화를 끊었을 때 루트반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신이 났다. 그는 당장 분석실로 들어가 소행성의 광물들을 조사할 수 있는 기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고개를 젖혀가며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루트반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배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저녁을 사겠다고 우겨서 실비아를 억지로 데려온 고급 식당이었는데, 먹고 있는 프랑스풍의 감자요리가 소화가 전혀 되지 않고 어딘가에서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무거운 기기를 끙끙거리고 가지고 오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문에 끼여서 못들어오는 줄 알았다니까요.”
실비아가 계속 루트반을 놀리고 있었다. 그게 재밌는 모양이였다. 루트반이 가지고 간 기기는 휴대용이 전혀 아니였다. 거의 피아노만한 크기의 계측기기를 억지로 뜯어서 미스코어로 가져간 것이였다.
“그.. 급해서 그랬습니다! 아주 중요한 연구니까요.”
루트반이 다급히 둘러댔다. 그걸 보고는 또 실비아는 웃기 시작했다. 루트반은 미칠 지경이였다.
“과연 어떤 연구길래 그렇게 급하셨을까요?”
실비아가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루트반은 그녀가 다가오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반중력 기술이라고, 이게 실용화된다면 엔진에 걸리는 저항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엔진 출력을 높일 수 있죠. 만약 플랜트에 적용한다면 항속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루트반은 얼떨결에 그녀에게 ‘반중력 기술’에 대해 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빤히 쳐다보며 듣던 실비아가 픽 웃더니 갑자기 말을 끊었다.
“제가 보고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구요?”
그녀의 말에 루트반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어! 진짜였나봐….” 실비아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루트반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용기를 내었다.
“네. 맞습니다! 처음부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요.”
루트반의 갑작스런 고백에 실비아는 눈이 커지더니,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어요.”
“아니 그걸 어떻게!”
루트반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실비아의 볼이 살짝 붉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을 한번 더 보고 싶어서 순항선 입고를 이틀이나 당겼어요.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아무려면 어때요. 이렇게 함께 있게 됐는데….”
실비아의 말에 루트반의 얼굴이 환해졌다.
“영원히라고 말했으니 꼭 책임지셔야해요.”
그녀가 또 웃었다. 루트반은 당장이라도 우주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날 이후, 두 사람은 플랜트에서 가장 뜨거운 연인이 되었다. 실비아는 루트반의 연구실로 매일 찾아왔고, 루트반은 그녀에게 정열적으로 자신의 연구를 소개했다. 그녀는 단 한번도 지겨워하지 않고 알아듣기 힘든 전문 용어들을 일일이 물어가며 그의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를 다독거리며 응원해주었다.
일주일 후, 보나르는 실비아를 긴히 불렀다. 사뭇 뭔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일주일이나 지났다. 니 실력이라면 충분히 알아내고도 남았을텐데 너 답지 않구나.
그 반중력 기술이란게 얼마만큼 완성되었는지 알아내는 것이 그렇게 어렵더냐?”
보나르는 실비아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루트반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일주일만 더 시간을 주세요.”
실비아는 보나르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일주일이다. 루트반이 혹시 눈치를 채거나 하진 않았겠지?”
“설마요. 그 사람은 너무 순수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요.”
“우리 가문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명심해라. 이제 가보거라.”
보나르는 돌리며 말했다. 실비아가 보나르의 뒷통수에 대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늘 똑같은 이유를 대시네요. 결국 아버지를 위한 것 아닌가요?
언제까지 내가 아버지를 위해 스파이가 되어야하는거죠?”
실비아의 가시돋친 말에 보나르가 휙 몸을 돌렸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밖에 없던 내가 목숨을 걸고 소행성의 광맥을 발견했을 때, 나 혼자만 생각했을 것 같으냐? 빌어먹을 그 대출금만 갚으면 끝날 줄 알았다. 우리 가족은 행복할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니 엄마가 병으로 죽고 너마저 똑같은 병으로 앓기 시작하자 나는 생각했다. 이 저주받은 플랜트는 돈이 있어야되고, 귀족이 되어야지 병원에도 갈 수 있구나, 행복해지겠구나, 반드시 그래야되겠구나 결심했다. 널 살리려고 나는 무슨 짓이든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리까지 올랐다. 내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혀야했는지 네가 가까이서 다 보았지 않느냐. 그런데 그런 말을 해?”
보나르는 격앙되어 실비아에게 고함쳤다. 실비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다 듣고 있다가 받아치기 시작했다.
“그 자리까지 오신 게 과연 아버지만의 힘이라고 생각하세요? 미스코어의 창업주 가문의 대가 끊어지자 차기 총수 자리를 놓고 지독한 암투가 벌어졌었죠. 그 때, 아버지는 후보 이름에도 오르지 못했어요. 그런 당신을 총수로 만든 건 바로 저에요! 친딸인 바로 내가, 간부들을 유혹했고 정보를 다 빼왔어요. 제말이 틀린가요? 아버지는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눈하나 깜짝하지 하지 않고 내게 말했죠. 이번이 끝이라고, 이번이 진짜 끝이라고, 딱 한번만 더 하자고…. 언제까지 해야하죠? 아버지가 의사회 의장이라도 되는 날에 끝나는 건가요?”
보나르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못한 딸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보나르가 정색하며 실비아에게 천천히 물었다.
“루트반을 진짜 사랑하게 된거냐?”
실비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런거야?”
보나르가 다시 물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였어요. 그렇게 간절하게 귀족이 되고 싶어하는 당신을 사랑해서, 한번도 거역하지 않고 그 더러운 일을 한거죠. 당신을 정말 지켜주고 싶어서….”
실비아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보나르는 실비아의 얼굴을 더이상 쳐다볼 수 없어 다시 등을 돌려버렸다.
“정말 이번이 끝이다. 내 약속하마.”
“저도 이제 끝이에요. 정보는 꼭 넘겨드릴께요.”
실비아가 쾅하고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보나르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이번이 끝이라는 그의 말은 사실이였다.
그 무렵 미스코어사는 고 에너지를 활용하는 신기술들을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바로 그들이 발견한 ‘미스트롤리움’이라는 신비로운 물질 때문이였다.
미스트롤리움은 스스로 순수한 에너지를 발생시키면서 다른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미스코어사는 이 물질을 어느 소행성 광산에서 처음으로 채취했다. 미스트롤리움을 분석한 연구진은 이 새로운 자원이 그동안 회사에서 연구해온 상온 핵융합로를 유지시킬 꿈의 물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핵융합로는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를 발산해 플랜트의 크기를 비약적으로 증설토록 하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상온에서 핵융합 반응을 오래 유지시킬 수가 없었다. 미스트롤리움이야말로 상온 핵융합 반응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꿈의 물질이였다. 소랑의 미스트롤리움만 있어도 플랜트를 두배 이상 확장할 에너지를 반영구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보나르는 이 새로운 자원과 기술을 자신이 코인 트러스트 진영에 합류할 무기로 쓰기로 했다. 그는 그 비천한 태생 때문에 로트필드 가문에게 소위 귀족으로 인정받는 것을 일생일대의 야망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스트롤리움과 상온 핵융합 기술을 로트필드 가문에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그전에 혹시나 핵융합 기술을 능가하는 새로운 기술 때문에 미스트롤리움의 독점권을 빼앗기지 않을까 우려했다. 보나르는 누군가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술을 위해 자신의 미스트롤리움을 내어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실비아를 보내 루트반의 기술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위협적인지 알아내려고 한 것이였다.
며칠 후, 루트반은 연구실에서 실비아에게 반중력 플레이트의 시제품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에 새로운 에너지원만 찾아낸다면 바로 플랜트에 적용시킬 수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신지구를 찾아 떠날 수 있어!”
“기술 개발이 거의 끝났다는 말이네요?”
실비아가 물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당신의 미스코어가 새로운 물질만 찾아준다면 금방 완성시킬 수 있을거야.”
루트반의 말에 실비아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옆에 놓여 있던 스패너를 집어서 높이 들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플레이트를 내려칠 것 같아 보였다.
“실비아! 뭐하는거야?” 루트반이 놀라 물었다.
실비아는 루트반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내가 만약 플레이트를 망가뜨려도 여전히 날 사랑할건가요?”
루트반은 갑작스런 물음에 황당했지만, 여전히 실비아를 다정하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걸 말이라고해? 플레이트야 다시 만들면 그만이잖아.”
그러자 실비아가 루트반의 컴퓨터로 가서 다시 스패너를 치켜들며 물었다.
“그럼, 여기 있는 데이터와 도면을 없애버린다면요?”
루트반은 그녀의 질문에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 머리속에 다 있다고~ 그래봤자 소용없어. 차라리 날 죽여.”
“내가 미스코어에서 있으니까, 총수의 딸이라서,
그 신물질 때문에 날 사랑하는 건가요?”
실비아가 다시 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루트반은 웃음기를 거두고 실비아에게 성큼 다가갔다.
“어서 대답해요!”
실비아가 스패너를 여전히 들고 있는 채로 재촉했다. 루트반은 실비아에게 달려가 와락 안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연구에 몰두하느라, 당신에게 너무 소홀했던 것 같네.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대답하라니까요.”
실비아가 루트반에게 안긴 채 말했다.
“당신이 그 누구든 상관없어. 당신이 악마라도 난 사랑할꺼야.”
“이 연구랑 저랑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요?”
실비아는 여전히 스패너를 들고 루트반에게 안겨있었다. 루트반이 실비아를 안은 채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선단을 위해서는 연구를 택하겠지만, 나를 위해서는 당신을 택할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 선택의 순간이 실제로 오지 않겠지만, 혹시 온다면 나는 둘 다 선택할거라구.”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실비아가 말을 하려는데 루트반이 키스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열정적인 키스의 순간이었지만 실비아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 실비아는 아버지에게 루트반의 반중력 기술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수준이라고 거짓으로 보고를 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보나르는 크게 기뻐하며 안심하였다. 그는 당장 로트필드 가문을 방문해서 자신의 계획을 제안하기 위해 서둘러 떠났다. 평생의 숙원이였던 것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작업만을 남겨둔 셈이었다.
“실비아. 이야기가 아주 잘 끝났다.”
로트필드를 만나고 온 보나르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다행이군요. 그럼 저는 약속대로 이 일을 그만두겠어요. 이제부터는 순항선에 타서 소행성 탐사를 다닐까 해요.”
실비아의 말에 로트필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순항선이라니! 그건 안된다. 오늘 너와 로트필드 가문의 셋째 아들과 혼인을 시키기로 약조를 하고 왔다. 미스트롤리움과 핵융합 기술을 내어 주겠다고 하니 그 쪽에서 먼저 그 얘기를 꺼내더구나.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니? 이제 그 일은 끝이라고 말이다. 앞으로는 귀족의 일원이 되어서 편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거라.”
실비아는 아버지의 말에 당황하며 말했다.
“제 삶이잖아요. 제가 원하는대로 하게 해주세요.”
“우리가 그동안 꿈 꿔왔던 일의 마지막 단계인데, 이제 와서 니 마음대로 하겠단 말이냐?”
보나르는 목소리를 높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끝까지 전 아버지의 소모품인건가요?”
실비아가 화가 나서 눈물이 맺힌 채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귀족이라고 귀족! 내가 널 귀족으로 만들었단 말이다!”
보나르는 축배를 들려고 가져온 와인병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넌 왜 내 마음을 모르는거냐? 플랜트에서 귀족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 않느냐. 난 네가 나보다 더 기뻐할 줄 알았다. 그 긴 세월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보나르가 머리를 감싸쥐며 말했다.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단지 다 끝나서 홀가분할 뿐이에요.” 실비아가 차갑게 말했다.
“그놈 때문이냐?” 보나르가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그는 책상을 쾅 치고는 다시 물었다.
“그놈 때문에, 니가 순항선을 타겠다는 거냐? 차마 양심에 찔려 그놈과 결혼은 못하겠고, 그래서 어디로든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야?”
실비아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였다.
“그런 이유라면, 니가 순항선을 타는 즉시 나는 루트반에게 너의 과거를 다 말해버릴 것이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니, 내가 널 지켜줄 이유도 없겠지. 순수했던 사랑이 모두 거짓이였다는 알게된다면, 그놈이 어떤 심정이 될런지는 니가 잘 생각해보도록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