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완연한 봄으로 접어들었음에도 국경의 새벽은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로드리케와 엔리스는 드래곤 부대를 이끌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동쪽 하늘에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칸다하르강 너머 평원지대에 에르시온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규모의 기갑부대와 자주포, 그리고 끝을 알 수 없이 뻗은 참호와 벙커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더 내려가면 공격받을 수 있으니 고도를 올려.”
앤리스가 낮게 날고 있던 로드리케에게 말했다.
“내가 대장이거든! 에르시온의 사거리쯤은 나도 알고 있다구.”
로드리케는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드래곤을 타려면 체중을 줄여야 한다고 평소에 제다가 만날 때마다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다이어트를 한 결정적인 이유는 친구인 앤리스에게 국경 드래곤 부대의 대장 자리를 빼앗기기 싫어서였다. 앤리스가 대장이 된다면 그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를 것이 틀림 없었다. 로드리케는 그 꼴이 보기싫어 밥도 굶어가며 테이밍 연습에 매진했다. 그 결과 최종 선발전에서 앤리스를 멋지게 누르고 대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단, 앤리스 몰래 제다에게 밤마다 특별 과외를 받은 건 절대 비밀이였다. 제다의 잔소리를 밤새 듣고 있으려니 저절로 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충분히 봤으니 이만 철수한다!”
로드리케가 부대원들에게 외쳤다. 제법 대장 티가 나는 의젓한 모습이였다. 드래곤이 줄을 지어 크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드래곤 부대의 용사들은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테이밍 중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정신을 잃거나 흥분해선 절대 안된다. 알겠나?”
국경수비대 식당에서 드래곤 부대 병사들에게 배식을 하는 동안 국경 수비대를 총 책임지고 있는 훔 장군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생명의 성에서 있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였지만, 국경 상황이 심상찮게 흘러가자 자진해서 남은 것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병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식당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가이아께서는 분명 에르시온 군에게 단 한 발자국의 침략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훔장군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병사들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훔장군은 그 모습을 흐믓하게 지켜보며 식당을 돌기 시작했다.
“많이 먹어라!” 병사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홈이 격려를 했다.
“자, 더 필요한 사람 없어? 배불러 먹어야 싸울 힘도 난다구~”
배식병 곤이 싱글벙글 웃으며 배식을 해주고 있었다. 로드리케가 손을 들었다. 곤은 냉큼 달려가 로드리케의 식판에 음식을 더 담아주었다.
“넌 다시 살찌기로 결심한거야?” 보고 있던 앤리스가 물었다.
“대장이 되었으니, 드넓은 풍모를 갖춰야지.” 로드리케는 입에 음식을 잔뜩 넣은 채로 말했다.
“로드리케 넌 정말 대단해.” 앤리스가 마지못해 엄지를 들어보였다.
“빨리 먹고 피기한테도 간식 주러 가야돼.” 로드리케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명색이 드래곤인데, 이름이 피기가 뭐냐?”
“피기는 내가 처음으로 테이밍한 놈이였어. 처음도 피기고, 마지막도 피기일꺼야.”
“대단하십니다요. 부대장님.” 앤리스가 삐죽거리며 말했다.
“근데 왜 넌 안먹냐?” 로드리케가 앤리스의 빈 식판을 보고 말했다.
“요즘 속이 계속 안좋아서. 괜히 억지로 먹었다가 전투에 지장이 생길까봐.”
“드래곤 멀미 하는 건 아니고? 지난 번에 누군가 니가 드래곤에 내리자마자 토하는 걸 봤다고 하던데?” 로드리케가 놀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 지난 번엔 내가 아깝게 졌지만, 여전히 내가 가이아 최고의 드래곤 테이머라는 걸 잊지마.” 앤리스가 잘난 척을 하며 말했다.
“그래. 그래 대단하셔요. 인정! 하지만 대장은 이 몸이시니까 내 지휘에 잘 따르도록.”
로드리케가 뽐내며 말했다. 앤리스는 받아칠까 하다가 그냥 로드리케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로드리케도 따라 웃었다.
“에르시온이 칸다하르 강을 넘어오고 있습니다! 전군 출동 준비하시랍니다!”
이때, 전령이 뛰어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식사를 마치고 대기중이던 부대원들은 장비를 챙겨들고 밖으로 뛰쳐 나가기 시작했다.
에르시온 진영에서 크산은 기갑부대 뒤에 마련된 보호 장갑으로 둘러싼 특수 벙커 안에서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뒤에서 참모 하나가 나타나 귓속말로 보고를 했다.
“의장님, 그림자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특식’을 먹었답니다.”
크산의 눈썹이 슥 올라가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그럼 진군해 볼까?” 크산이 의자에서 일어나 말했다.
“도하지점에 드래곤 부대가 공격을 준비중입니다. 숫자는 많지 않으나 모두 화룡들이라 지금 건너다가는 피해가 클 것 같습니다!”
전방 상황을 보고하는 부관이 긴장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을 들었음에도 크산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래서 그림자를 심은게 아니냐. 더욱이 ‘특식’까지 먹었다고 하니…. 크크크”
“아!” 부관이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은 영민해서 매사에 조심성이 뛰어나다고 들었네. 그래서 절대 덫 따위엔 걸리지 않는다지. 반면 인간은 드래곤보다 훨씬 멍청해서 쉽게 함정에 빠진다네.
어리석은 인간들이 감히 드래곤을 길들이겠다니!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오늘 가이아는 똑똑히 알게 될 걸세.”
크산은 앞에 있는 칸다하르 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부관이 크산에게 꾸벅 절을하며 말했다.
“멍청한 가이아 놈들. 미스트롤리움을 채취하지 말자구?
어디 하늘에 대고 아수라한테나 이야기해 보시지 그래. 크크크.”
크산이 웃자 부관도 따라 웃었다.
“그럼 차례로 성을 격파하실 생각이십니까?” 부관이 물었다.
“아니다. 국경 수비대만 무너지면, 다른 성은 무시하고 수도인 생명의 성까지 곧장 진격한다.”
크산이 손을 번쩍 들었다가 앞으로 뻗었다. 진군 나팔이 울리고 에르시온 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군! 가이아로 진격!”
강 반대 쪽의 훔 역시 바쁘게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성 안에 광장에는 드래곤들이 줄지어 출격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도하지점에 드래곤 부대의 화력을 집중하라! 로드리케! 먼저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훔의 명령에 로드리케는 자신의 드래곤인 피기에 올라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앤리스, 가자!”
“드래곤 부대 출동!” 앤리스가 복창하며 크게 외쳤다.
용사들의 파르에서 빛이 나면서 드래곤들의 파르도 공명되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병사들이 피를 토하며 하나둘씩 드래곤에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로드리케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대로 드래곤을 타고 있는 사람은 앤리스와 자신 뿐이였다.
“로드리케! 너 괜찮아?”
앤리스가 다급히 로드리케의 입을 가리키며 말했다. 놀란 로드리케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닦아보니 자신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갑자기 내장이 꼬이는 듯한 급격한 복통이 밀려왔다. 몸도 마비가 되는 듯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
“뭐지? 독인가….”
견뎌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로드리케 역시 정신을 잃고 드래곤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앤리스가 황급히 달려와 부축을 했다.
“쾅! 쾅! 쾅!”
“에르시온의 포격이다!”
에르시온의 자주포가 성 안에 머물러있는 드래곤들을 향해 포격을 하기 시작했다. 포탄이 떨어지는 데도 불구하고 드래곤들은 주인을 잃어버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연 상태라면 이미 날아갔어도 벌써 날아서 도망쳤겠지만, 테이밍이 시작된 시점이라 드래곤들은 주인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였다.
“로드리케 정신차려! 어서 피기라도 구해. 나라도 출격해서 적들을 막아보겠어!”
앤리스가 주저 앉아 있는 로드리케를 흔들어서 깨우려했다.
“너 혼자선 안돼…. 명령이야….”
로드리케는 희미해지는 의식을 겨우 붙잡으며 앤리스에게 말했다.
“대장인 네가 쓰러졌으니, 부장인 내가 이제 대장이야.”
앤리스는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의 드래곤에 올라탔다.
“로드리케, 드래곤을 구해!”
앤리스는 드래곤을 몰고 높이 날았다. 앤리스가 내려다보니 포격으로 드래곤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로드리케가 힘들게 피기를 자신 쪽으로 부르고 있었다.
앤리스는 안도하며 드래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자! 친구들의 복수를 하러가자!”
앤리스는 강을 건너고 있는 에르시온 군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드래곤 한 기가 날아옵니다!” 부관이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오호 그나마 살아남은 놈이 있었나보군. 혼자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볼까?
집중 사격하라.” 크산은 비웃으며 말했다.
“집중사격!” 부관이 복창했다.
에르시온 군의 대공 화기가 일제히 앤리스의 드래곤을 겨냥해 발사되었다. 앤리스의 드래곤이 빠르게 선회하며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가이아시여. 저들을 지옥으로 보내소서!”
앤리스의 드래곤이 길고 큰 화염을 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타들어가는 에르시온 부대를 보며 앤리스는 웃고 있었다. 총알이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앤리스의 드래곤이 힘겹게 싸우는 장면을 보고 있는 훔은 참담한 심정이였다. 에르시온 군대는 이미 성 앞까지 당도해서 중화기로 장벽을 깨부수고 있었다. 드래곤을 철썩같이 믿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벽이 깨지면 전군 필사의 각오로 끝까지 싸운다!”
홈이 외쳤다. 홈의 앞에는 커다란 야수들과 함께 비장한 눈빛으로 대기를 하고 있는 몇 백명의 부대원이 전부였다.
“어머니 가이아에 영광을!”
부대원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훔은 중무장을 하고 내려와 십년동안 함께했던 자신의 야수에 올라탔다. 참으로 오랫만에 스파타를 뽑아드니 기분이 몹시 좋았다.
어머니 가이아를 위해 죽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좋았다.
성 한쪽 장벽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망루로 실려와 누워있던 로드리케는 겨우 몸을 가눈채 강쪽의 전투를 보고있었다. 화염을 내뿜던 앤리스의 드래곤이 서서히 추락하고 있었다. 수백 발의 총을 맞고 벌집이 된 채로 드래곤의 등 위에서 축 늘어져 있는 앤리스를 보았다. 로드리케의 눈이 커졌다.
“앤리스! 안돼!”
로드리케가 소리를 지르자 피가 한웅큼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진정하세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의무병이 달려와 로드리케를 진정시켰다.
“독인가? 피를 타고 내 몸을 돌고 있는건가?” 로드리케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해독제를 놓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다른 부대원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의무병이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늦었다고…?”
로드리케는 피식 한번 웃더니, 의무병 옆에 있던 메스를 집어 자신의 다리를 찔렀다.
검은 피가 쏟아져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시는…?” 의무병이 놀라 쳐다보았다.
“가이아 국경 수비대 드래곤 부대장 로드리케. 지금 출격합니다.”
로드리케가 비틀거리며 걸어나가고 있었다.
“피~기!”
로드리케가 목놓아 부르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드래곤이 벌떡 일어나 날아왔다.
“가자!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내 친구, 앤리스를 만나러.”
로드리케가 드래곤에 올라탔다. 검붉은 핏줄기를 흩뿌리며 그는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통한 소식은 속절없이 너무나 빨리 가이아 왕궁으로 전해졌다. 국경수비대가 처참히 무너지고 전멸했다는 보고에 누마미스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이럴 수가…. 훔 장군과 드래곤 부대는?”
“훔 장군은 전사했고, 드래곤 부대 역시 전멸했습니….” 전령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아버지가….”
레센느가 충격으로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듀발이 얼른 레센느를 붙잡았다.
“앤리스, 로드리케….”
제다는 친구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낄낄거리며 서로를 놀려대던 그들이었다.
“다른 성들은 어찌되었나?” 듀발이 물었다.
“다른 성들은 모두 수비에만 전력하고 있으나, 에르시온 군은 곧장 이곳 생명의 성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령이 대답했다.
“아스테, 그렇다면 적은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듀발의 말에 누마미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전하, 저도 전투에 나가겠습니다.”
제다의 말에 누마미스가 고민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야지.”
“다른 성들이 도와준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역부족입니다.”
듀발이 단호하게 말했다. 충격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레센느는 그런 듀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명의 성에 남은 드래곤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끝장을 보지 않고 항복하잔 말입니까?” 레센느는 듀발을 보며 따지고 들었다.
“어차피 에르시온의 가장 큰 적은 카일럼입니다. 양국이 연합하여 맞서는 것이 신지구의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듀발이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
레센느가 격앙되어 소리쳤다. 듀발은 레센느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말을 이었다.
“만일 양국이 서로 혈전 끝에 전력의 대부분을 상실한다면, 카일럼의 크롬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통일을 이룰겁니다.”
“다른 성에서 보급은 어찌되고 있나?”
누마미스는 화제를 돌려 다른 신하에게 물어보았다.
“보급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신하가 힘없이 대답했다.
“제가 직접 가서 크산을 막고 화친을 제의해보겠습니다.”
듀발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무릎을 꿇고 말했다. 누마미스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한숨을 한번 내쉬고서는 말했다.
“보급도 끊어진 상황이라…. 듀발 장군에게 이번 전쟁의 전권을 일임하겠네.”
“안됩니다! 끝까지 싸워야합니다.”
레센느가 누마미스에게 달려가 말했다.
“레센느,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미안해.
지금은 안돼. 참고 후일을 기약하자.”
듀발이 레센느의 팔을 잡아 끌며 말했다. 레센느는 듀발의 팔을 뿌리치고 휙 돌아서 나가버렸다. 제다는 평소 다정하던 레센느가 이성을 잃고 돌변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제다는 듀발을 쳐다보았다. 듀발은 표정없이 가만히 서있었지만 그의 참담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다는 레센느와 듀발 양쪽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친구들과 병사들의 죽음이 너무나 원통하고 원통할 뿐이였다.
다음날, 듀발은 생명의 성으로 진입하는 다리 위에 홀로 서서 어느새 당도한 에르시온의 군대를 멈춰 세우고 있었다. 다리 뒤에는 제다의 드래곤 애쉬를 포함한 십여 마리의 드래곤들과 익룡부대, 야수부대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나는 가이아의 대장군 듀발이오!
가이아의 모든 드래곤과 용사들이 죽기로 싸운다면 승리는 장담하기 어렵겠지만,
그 쪽 에르시온 역시 상당한 전력을 상실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듀발은 마중 나온 크산을 보며 말했다.
“호오! 상당한 박력이군요. 대장군답소이다. 그대의 말이 맞소이다.
그래서 누차 동맹을 제의했지만 가이아쪽에서 매번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내부에서도 찬반이 팽팽히 맞서 결정이 쉽지 않았소.
하지만 지금은 내가 결정할 수 있게 되었소. 어떻게 하시겠소?”
“좋습니다. 듀발 대장군. 한가지 조건만 약조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동맹을 맺고, 군대를 즉각 물리겠소이다.”
듀발의 말에 크산이 슬며시 웃으며 답을 했다.
“그 조건이 무엇이오?” 듀발이 물었다.
“귀국의 제다 왕자를 에르시온으로 모셔가려하오.”
능글능글 웃으며 말하던 크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크산의 요구사항을 듣자 분위기가 일순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볼모로 삼겠다는 것이오?”
“동맹의 징표지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크산은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듀발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왕국의 운명이 자신의 어깨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참았다. 무슨 말로 이 위기를 모면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의외로 제다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제다의 발언에 듀발은 깜짝 놀랐다. 크산 역시 놀랍다는 표정으로 제다에게 물었다.
“호오, 그게 뭡니까?”
“칸다하르강에서 죽은 자들을 배웅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다는 담담하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가이아의 사람들은 모두 울컥하는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던 왕자가 어느덧 훌쩍 커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다의 깊은 배려가 기특하고, 감사하고 또 너무나 미안했다.
“시간은 많이 못드립니다. 하루를 드리지요. 한가지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우리도 한가지 부탁을 더 하겠습니다.”
크산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뒤에서 걸어나왔다. 국경수비대의 식당에서 배급을 하던 곤이었다. 크산이 그림자라 부르던 그 첩자였다. 크산은 곤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곤, 너는 가이아에 남아서 생체 병기장을 감시하고, 에르시온과의 협조를 도와라.”
첩자의 독으로 인해 국경수비대의 드래곤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접했던 가이아 사람들은 곤을 보자마자 그가 그 첩자란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이아 사람들은 분노에 찬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곤은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웃고 있었다.
“앞으로 곤에게 에르시온의 대사급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의 말 한마디에 가이아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으니 유의하시길….”
크산은 특유의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곤을 소개했다. 곤이 깍듯하게 크산에게 인사를 한 뒤 가이아쪽으로 걸어왔다. 제다는 곤을 쳐다보았다. 첩자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두고 싶었다. 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부하들을 거느린 채 으스대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애쉬의 화염으로 뼛조각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불태워죽이고 싶었지만 제다는 꾹 참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곤을 죽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날 밤, 가이아 왕궁에서는 왕비 아나타가 먼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무엇이라도 해먹이고 싶어서 제다에게 자꾸 묻고 있었다.
“제다야, 먹고 싶은게 있으면 말해다오. 뭐든지 해줄게.”
“한날 죽기로 맹세한 친구들이 죽었는데, 제가 무슨 염치로 밥을 먹겠어요.”
제다가 힘없이 대답했다.
“살아서 해야 할일이 남아 있으니, 살아 남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죽은 자들의 몫까지 챙겨먹고 힘을 내야지.”
아나타가 제다를 다독이며 말했다. 제다는 더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엄마가 해주는 퓨리에를 먹고 싶어요.”
잠시후, 제다는 어머니가 해준 퓨리에를 눈물을 흘리며 먹고 있었다.
“많이 먹으렴, 우리 아들….” 아나타가 제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 제다는 아나타의 눈을 쳐다보았다.
“너무… 맛있어요.”
함께 식탁에 앉아있던 누마미스는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차마 아들을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아나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였다. 왕궁의 모든 사람들이 제다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밤이였다.
다음날 아침. 제다를 배웅하기 위해 생명의 성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누마미스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제다야. 부디 건강하거라. 나라가 힘이 없어 왕자를 지키지 못하는구나.”
“아버지, 지키지 못한 것은 왕자가 아니라 나라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왕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제다가 답을 하자 누마미스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였다.
“불쌍한 우리 아들, 이 엄마는 네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진 않구나.”
아나타는 하염없이 울며 제다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어머니, 걱정마세요. 삼촌도 함께 가는 걸요. 삼촌과 함께 동맹을 승리로 이끌고 꼭 돌아오겠습니다.”
모두가 슬퍼하고 있을 때 백발의 제사장 아스테로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제다야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네가 가야하는 곳은 원래 우리의 심장이였던 곳이다.
그 곳에 가서 우리의 과거와 그들의 현재를 보거라. 그리고나서 미래를 생각해보거라.
그리하면 네가, 우리 가이아가 가야할 길이 보일 것이다.”
"여기를 떠나면 여기 생각을 더는 하지 말거라. 편지도 쓰지 말아라. 너희 부모나 숙부가 말하는데로 하지 말아라."
제다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자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스테로는 나즈막이 말을 이어갔다.
"가이아의 왕자, 제다는 잊어라. 어디에든 살 길이 있고 그걸 찾아야만 한다."
제다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어렴품이 알것 같았다. 아스테로는 제다의 표정이 변하자 더욱 굳은 표정으로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돌아오려고 하면 죽어서 올것이요. 돌아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면류관을 쓰고 오게 될것이다."
그제서야 제다는 정신을 차리고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스테로님." 그래도 아크 더 베르니아에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보게 되네요. 그것도 공짜로요.”
제다가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꿔보려했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옆에 있던 듀발이 무거운 이별 장면을 이만 끝내기 위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출발하자. 왕자님을 호위하라!”
천천히 출발하는 일행들을 뒤따르며 듀발은 레센느를 보며 참았던 말을 꺼냈다.
“레센느, 너는 남아서 가이아를 지켜다오.”
듀발의 마지막 말에 레센느가 듀발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차갑게 말했다.
“배신자! 아버지의 원수에게 순순히 항복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