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중앙신전의 회랑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로이 태자에게 좌우에 도열하고 있던 사제들이 예를 갖추고 있었다. 중앙회랑의 끝에 위치한 제단에는 최고 신녀 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이가 계단을 올라 제단에 다다르자 린이 정중히 예를 갖춰 맞이했다. 엄숙한 신관의 제복이 무색할 정도로 눈부신 린의 미모였지만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으로 로이를 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전갈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이 또한 창백한 얼굴로 무표정한 표정으로 대답을 이어갔다.
"예정에 없는 요청으로 폐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빛의 사원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무고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면 당연히 저희 신녀들이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리로 오시지요."
무표정한 린의 안내를 받으며 로이는 고해의 방 쪽으로 향했다. 로이를 따라 고해의 방으로 들어오는 무녀 시종들에게 가벼운 손짓을 하며 린이 이야기를 했다.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도 좋다."
린의 지시에 시종 무녀들은 고개를 숙인 후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방 안에 두 사람만 남겨지자 육중한 철문이 몇 겹이나 상하좌우로 내려와 문을 막았다. 그 순간, 앞으로 몸을 숙이면서 로이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울컥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놀란 린이 황급히 다가와 로이를 부축하며 로이의 이름을 다급히 불렀다.
"로이…!!"
로이를 부축하는 린의 얼굴에는 아까의 무표정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이 가득차 있었다. 린은 혼자서 힘겹게 로이의 피묻은 옷을 벗기고 그를 제단 위에 뉘였다. 로이의 몸은 생기 없이 파리하게 굳어 있었다. 몸 곳곳에 검푸르게 나 있는 커다란 저승꽃들 같은 모양의 멍들, 로이의 안색은 마치 산송장과도 같이 창백했다. 린이 수술용 선글라스를 쓰고 제복대신 수술복처럼 생긴 옷을 입고 홀로그램으로 스위치를 켜자 제단에서 올라온 둥근 유리막이 로이를 인큐베이터처럼 감쌌다. 린은 로이의 현재 상태가 홀로그램으로 출력되자 심각한 얼굴이 되어갔다. 린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급히 손짓을 했다. 둥근 유리막속에 꿀처럼 보이는 액체로 가득차자 로이는 몸은 인큐베이터의 가운데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기침하듯 폐에 남은 공기는 내밷었다. 그리고는 둥근 도넛모양의 형광색 전구가 위 아래로 움직이며 로이의 신체를 비추고 있었다. 몇 시간을 온 몸에 땀을 흘리며 그녀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마침내 로이의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자 그는 비로소 나즈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으..윽.."
치료가 끝나자 유리막 인큐베이터 속에 있던 흐려져 있던 액체가 모두 빠지고 유리막이 제단 속으로 들어갔다. 힘겹게 눈을 뜨는 로이 곁에서 린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로이는 힙겹게 웃어 보이며 미안한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안해….내가 또 당신을 힘들게 만들고 말았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완강하게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로이, 당신인걸..
나라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이런 참혹한 굴레를 스스로 지고 계셔야 하니.."
로이의 손을 잡고 있는 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 린의 얼굴을 매만지는 로이는 가슴이 먹먹해져 목이 메이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지…이것이 황족으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운명인 걸.."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에요. ‘신병기갑’의 레디에이션이 체내 한계치를 넘고 있어요.
디레디에이션으로 당신의 DNA를 복원시키는 것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어요."
린은 이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지 계속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결국…"
"그대에게 몹쓸 비밀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나를 부디 용서해 줘. 내 몸은 이제 그대와 함께 있는 이 순간에만 짧은 평안을 누릴 수 있어.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여인이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내 처지는 무척 원망스럽네."
"미안해..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로이."
로이와 린은 애달픈 표정으로 포옹하며 서로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린의 두 눈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눈물이 로이의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한편, 같은 날 밤 에르시온 왕국의 중앙의회 대회의장에서 연맹의 모든 영주와 중앙의회의 의원들이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토나도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토벌의 의견을 드높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 엘토나도 경은 목소리를 높여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저 해적들은 불순분자들이오. 우리의 체제를 어지럽히는 것도 모자라 우리의 땅까지 내놓으라니! 저런 자들과 어찌 타협하라는 말입니까?"
그러자 같은 파벌로 보이는 영주도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만약 저 따위 해적들과 타협하게 된다면, 속국인 가이아는 물론이고 카일럼마저 우릴 얕보게 될 겁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기회를 봐서 해적들을 쳐버립시다!"
좌중의 함성이 높아지자 크산 의장은 진정을 시켜려는듯 목소리를 깔았다.
"흠…여러분들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허나 조금만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과연 일개 해적의 무리가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단독으로 벌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영주들이 서로를 보며 눈을 크게 하며 눈치를 살폈다. 크산은 주위를 끌었다 생각을 하자 목소리를 높여갔다.
"틀림없이 더 큰 배후가 있을 것입니다. ‘로스트’라는 저 해적 하나를 처치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란 얘기에요."
영주들은 크산의 표정을 살피며 궁금해 했다.
"그러니 일단은 기다려 봅시다. 인질들 중엔 여러분들과 관계있는 자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태자 전하가 직접 사전 교섭에 나서겠다고 요청한 만큼 기회를 드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크산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의중을 파악한듯 다들 한마디씩 보탰다.
"의장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반면, 크산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했다.
‘알 수가 없군. 실패할 게 뻔한 교섭에 스스로 뛰어들다니..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다만 이번 일은 도리어 자신의 무능함을 영주들에게 알리는 꼴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로이 황태자!’
크산은 속내를 감춘 표정으로 시종장에게 물어 로이의 행방을 물었다.
"태자 전하께선 벌써 출발하셨느냐?"
시종장은 어찌 대답할지를 망설이다 포기한듯 사실대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게…잠깐 중앙신전에 들르시느라 아직 출발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크산은 눈이 가늘어지면서 살짝 번뜩이다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중앙신전?"
시종장은 이내 변명하는 말을 덧붙었다.
"예, 사안의 경중을 생각하여 미리 신병기갑의 재조정을 하시겠다고.."
"…."
뭔가 납득이 안 되는 표정을 짓지만 이내 그 표정을 감춘 크산은 거처로 돌아와 서재로 다급한듯 걸음을 옮겼다. 불이 꺼진 서재로 들어오자 나지막이 누군가를 불렀다.
"거기 있느냐…."
그 말과 함께 한 소녀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나타났다. 검은 색의 옷을 두르고 짧게 자른 머리에 무표정한 얼굴이 마치 비스크 돌처럼 무생물같은 느낌을 주는 소녀였다.
"네.."
"로이 황태자가 빛의 사원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예정에도 없이 중앙신전에 들렀다고 한다. 아무래도 걸리니 그 점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줘야겠다."
소녀는 대답없이 살짝 고개를 숙이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소녀가 사라지자 크산은 미소를 지었다.
"흠.. 생각보다 쓸모는 많은 것 같군. 내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다음날 아침 리바이던 호의 로스트의 방 중앙에 놓인 탁자에는 음식과 함께 술병이 잔뜩 널려 있었고 테이블의 양쪽에는 로스트와 스티븐스가 앉아있었다. 둘은 밤새도록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로스트는 꽤 거나하게 취한 것 같았지만, 스티븐스는 딱히 취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형이랑 이렇게 밤새도록 술을 마셔보는 것도 오랜만입니다."
스티븐슨은 언제인지 기억을 더듬듯이 눈을 굴렀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스승님이 돌아가신 날 이후론 처음인가?"
"그 때 스승님은 사형사제 간에는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는데, 사형이 나한테 대포를 냅다 쏴댈 줄이야. 스승님이 보시면 기겁하셨을 거요."
스티븐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자네가 피할 것쯤은 예상하고 쏜 거야."
"흐흐흐."
로스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비워 버렸다.
"그래… 결국 사형은 로이, 그 녀석을 따르기로 한 거요? 그 능력에 맞지 않게 집사 노릇까지 하면서?"
"이왕이면 희망을 건 거라 해 주게. 난 그 분에게서… 이 신지구에 평화를 가져다 줄 왕의 자질을 보았다네. 난 그 분이 진정한 성군이 될 수 있도록 보필할 생각이야."
로스트는 고개를 돌리며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쳇. 여전히 말은 번드르 하지. 그래, 인정은 합니다. 로이 그 놈, 대단한 놈이긴 해요. 분명 좋은 왕이 될 거요."
스티븐슨은 자기도 모르게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자네도 나랑 같이…."
로스트는 그 표정이 못마땅했는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난 더 이상 왕이란 존재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로스트의 표정은 어느 새 취기를 깬 듯 눈빛이 번뜩였다.
"이 난세를 해결할 자는 왕이 아니라 영웅입니다! 로이 그 놈은 훌륭한 왕이 될지는 몰라도 영웅이 될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내 자기한 한 말에 자신이 없어졌는지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전~혀! 재미가 없다고요! "
"그럼 자네가 말하는 그 영웅이란 인물은 찾긴 한 건가."
"글쎄요.."
로스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미묘한 표정으로 다시 술잔에 술을 채우고 들이켰다. 그러면서 로스트는 속으로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재미있는 녀석을 하나 만나긴 했지. 무사히 살아 남았으려나 모르겠군, 그 녀석..’
크롬이 “아수라”의 조종 크리스탈과 마주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아수라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다소 불안해보였지만 그는 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네가 움직여줘야 겠어."
“빛의 사원”을 커버하려면 틸리아테페 전선의 절반, 카일럼의 후방 일부가 열릴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어. 레나가 그곳에 있다면, 그 아이는 나의 모든 것이다."
"레나. 아수라의 계약자, 나의 친구."
"부탁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당신은 아수라의 계약자가 힘을 맡긴 사람이니까요."
"전투를 치른 후라 힘들 테지만, 부탁하다."
"아닙니다. 저는 계약자를 위해 존재하니까. 괜찮습니다. 하지만 목표좌표에 도달하기까지는 앞으로 일주일. 그때까지는 당신의 몫입니다."
"그렇군, 일주일이라.."
이때, 다급한 신하의 표정이 벽면에 입체영상으로 띄워졌다.
크롬은 긴장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저… 그것이…"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느냐!"
"에르시온의 태자 로이가 지금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하옵니다. 아무런 사전협의가 없었는데… 무조건 폐하를 뵙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를 해 왔습니다.
크롬은 먹이를 노려보는 사자처럼 두 눈에 광채를 발하며 물었다.
"정말인가?"
아수라는 담담하게 상황을 크롬에게 보고했다.
"오고 있다. 한대의 비행선. 에르시온으로부터. 곧 나의 범위 안에 들어 온다. 적인가? 제거하길 원하나? 아니면 손님으로 맞이할 것인가?"
크롬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명했다.
"일단 손님으로 맞이한다. 적이라고 판단되면 돌려보내지 않으면 되니까.."
아수라는 크롬의 명을 신하들처럼 되뇌었다.
"일단은 손님. 맞이한다."
크롬은 오랜만에 흥이 났는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흠… 드디어 에르시온의 “젊은 수호자”를 만나게 되는 건가? 기대가 되는군. 하하하."
손짓을 하자 조종 크리스탈이 빛을 발하고, 크롬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르시온 크산의 집무실에서는 어두운 실내에 희미한 조명 아래 크산이 앉아 있고, 맞은 편 어둠 속으로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암흑길드”의 수장인 흑마였다. 그의 주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스산한 느낌의 음모가 둘러쳐진듯 보였다.
크산은 마치 오랜 친구한테 이야기하듯 친근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의 로이 황태자께서 드디어 움직이셨다는군."
흑마는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쳐줬다.
"그렇다면 우리도 움직일 때가 된 것이겠군. 멋진 볼거리를 선사해주지. 뒤틀린 야심가 친구."
크산은 그말에 잠시 인상을 구겼다가 이내 유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뒤틀린 야심가라.. 아니지, 나는 다만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되찾아 오고 싶을 뿐이야."
흑마는 썩 궁금하진 않지만 흥미는 있다는 말투였다.
"여전히 현재의 황제가 선대 황제인 네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 건가?"
크산은 이내 좀 흥분한 어투가 되었다.
"그는 고립된 선황제의 군대를 의도적으로 혼전 속에 방치했어. 내 아버지의 권좌를 노리고.."
"후후후. 재미 있는 해석이군… 아무렴 어떤가? 우린 우리 몫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크산은 자기 속내를 들어낸듯 한것이 불편한게 느껴져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차질 없이 만전을 기해야 해. 일을 그르쳤다간 모두가 끝이야. 두 번째 기회 따위는 없다구."
흑마는 마른 웃음으로 눈을 내려깔았다.
"크흐흐. 건방진 놈. 그 따위 걱정은 접어두고 어떻게 약속을 지킬지나 궁리하라고. 우리 사전에 실패 같은 것은 없으니까. 물론 배신이라는 것도 용납하지 않지!"
"후후후. 이 손으로 계약서라도 써 주길 원하나?"
"그 따위 것은 필요 없어. 약속을 하는 것은 너지만 지키게 하는 것은 우리니까. 지키게 할 수 없는 약속이라면 애초에 받아내질 않았겠지. 흐흐흐."
크산은 흑마의 태도에 심기가 뒤틀렸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지금은 어쩔수 없었다.
"크하하. 재미있는 표현이군. 좋아 “암흑길드”의 힘을 믿어 보지."
"크흐흐흐…"
"아무튼 이제 너희들의 생존과 나의 웅대한 꿈은 한 배를 탄 운명이다."
"그렇군. 크흐흐"
흑마가 사라지자 크산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긴 우주방랑기에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실험의 재료로 삼은 미치광이 인간들의 후예들. 가공할 초능력자들, 하지만 저주받은 운명으로 소수의 생존자들만 남은 멸종위기의 돌연변이들… 그대들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지켜보겠다.’